한국일보

전망대 - 잊혀진 영웅들

2023-06-29 (목) 이상민/공인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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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거의 무방비 상태에서 6.25 동란을 맞았다. 당시 북한은 곡사포, 대전차포, 박격포를 합해 거의 2,000문, 전투전폭기 211대, T-34 소련제 탱크 242대에 20만의 대군을 갖고 있었다. 우리는 국군 10만 명, 대포 90문과 박격포 960문 정도 있었고, 탱크와 전투전폭기는 전혀 없었다.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군사력이었다.

개전 초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던 우리에게 대한해협 해전의 승리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참 많다. 이 전투의 승리는 어쩌면 우리나라를 구했을지도 모른다.

대한해협 해전을 알리고자 백두산함을 먼저 소개한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대한민국 국군이 창설됐고 손원일 장군(대령에서 준장으로 진급)이 초대 해군제독에 임명됐다. 당시 우리나라 해군은 경비정 몇 척만 있었고 실 전투함은 단 한 척도 없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손 제독은 전투함을 도입하고자 모금활동을 한다. 군장병들이 나서서 봉급의 일부를 기부했고 국민들이 성금을 내서 1만 5,000 달러를 모았다. 여기에 정부가 4만 5,000 달러를 보태 6만 달러를 만들어 1949년 말 미국으로 건너가 우리나라 첫 전투함 백두산함을 구한다. 원어명 Whitehead를 따서 명명했다고 한다.

450톤급 소형 함정이다. 2차대전 후 폐함하려던 군함이라 포 하나 장착돼 있지 않았었다. 이것을 우리 군인들이 수 개월 간 수리하고 포와 기관단총을 장착해 군함의 면모를 갖췄다. 1950년 3월 20일 백두산함은 드디어 조국을 향해 하와이를 떠났다. 그로부터 3주 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약 2개월 전 진해항에 모습을 드러낸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은 38선을 넘어 총공을 시작했고 같은 날 대한해협 부산 앞바다에도 수상한 거함이 출현했다. 이를 포착한 우리 해군은 재빠르게 승조원 60명을 태워 백두산함을 보낸다.

적선은 1,000톤급의 수송선이었고 인민군 특공대 600명이 승선해 있었다. 이들의 임무는 전쟁이 나면 부산으로 침투해 남부를 교란시키는 일이었다. 적화를 위해 철저하게 세운 작전이었다. 적함의 크기와 규모는 백두산함이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정체를 밝히라며 백두산함이 경고 사격을 했더니 적선에서 포로 응사하며 전투는 시작됐고 우리의 해병은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사력을 다해 싸웠다.

배의 차이가 커서 원거리 사격은 소용이 없었다. 선체 아래를 공격하는 것만이 승산이었다. 백두산함은 위험을 무릅쓰고 거리를 좁혀 적선에 접근했다. 우리가 쏜 함포 다섯 탄이 명중해 선체 아래쪽에 구멍을 냈다. 거함은 침몰했고 600명의 인민군 전원은 수장당했다. 우리의 피해는 크지 않았다. 적이 쏜 포탄에 조타실이 부서졌고 안타깝게 김창학 삼등병조와 전병익 이등병조가 전사했다. 그외 두 명의 부상자가 있었다.

6.25 때 대한해협 해전에서 해병은 우리에게 첫 승전을 안겨줬고 실로 우리나라를 지켜냈다. 적의 대규모 특공대가 부산에 상륙했으면 최후 저지선이었던 낙동강 방어선도 없었을 것이고 아마 인천상륙작전 또한 실현되지 못했을 것이다.

400여년 전 전쟁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던 임진년 조선의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을 만들어 남해에서 나라를 구했다. 전쟁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던 1950년 대한민국의 손 제독은 백두산함 단 한 척을 도입해 같은 해협에서 나라를 구했다. 백두산함에서 용감하게 싸운 해병들,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영웅들이다.

<이상민/공인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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