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특별 기고] 3.1운동과 미주한인사회

2026-03-06 (금) 07:35:51 주동완/코리안리서치센터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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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2월 19일 현순 목사는 당시 [기독신보] 사장인 김필수 목사의 권유로 3·1운동 모의에 참여하였다. 다음날 함태영 목사 등 3·1운동 지도부는 영어를 잘하는 현순 목사를 상해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현순 목사에게 3·1운동을 해외에 널리 알리는 임무가 부여되었던 것이다. 마침내 2월 24일 현순은 가족들을 남겨둔 채 용산역을 떠나 3월 1일 상해에 도착, 독립선언서를 영어로 번역하여 서방 세계에 타전하였다.

3월 9일 오전 11시, 상해에 있던 현순이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 앞으로 전보를 보내 미주에도 3·1운동 소식이 전해졌다. 안창호는 이승만과 정한경에게 3·1운동 소식을 전하고, 샌프란시스코의 영자신문에도 현순의 전보 복사문을 전달해 미국 사회에 알렸다.


상해에서 전보를 받은 당일 샌프란시스코 한인감리교회에서 개최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3·1독립선언 소식을 전하고 만세를 열창하였다.

당시 미주에서 ‘임시정부’의 역할을 하고 있던 ‘대한인국민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는 기관지였던 신한민보를 통해 그 날의 감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재류동포 남녀노유 전체가 모두 출석하였는데 미친 듯 만세를 부르는 소리는 천지를 진동하고 기쁨에 겨워 눈물을 뿌리는 자가 많더라.”

3·1운동의 소식이 전해진 이후 안창호는 3월 9일 하오 7시 30분경 한인감리교회에서 중앙총회 임시협의회를 개최하여 3·1운동 이후 국민회가 시급히 해야 할 안건을 선정하여 통과시켰다.

이어서 안창호는 3월 13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석상에서 “피를 흘릴 각오를 하며, 미국에 있으므로 담부한 특별책임은 미국의 여론을 일으키는 것이며 또 미주 한인의 최대 책임은 재정공급에 있다. 수입의 20분의 1을 납부하도록 조치할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중앙총회에서는 이번의 재정 확보를 ‘독립의연’(獨立義捐)’이라고 이름하고, 중앙총회에서 직접 북미, 하와이, 멕시코의 각 지방에 출장소를 두고 3월까지 1인당 10달러의 의연금을 거두게 하였다.

3월 27일 미주 각 지방의 대표들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나 조국독립운동에 미주 한인들도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동참하기로 결의하여, 안창호를 상해에 대표로 파견하기로 하고 김호는 미 서부지역을 순회하여 본국의 독립운동을 알리게 하며 모금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3·1운동의 결과로 1919년 4월 11일 상해에서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5월 2일에 개최된 제4회 임시의정원 회의를 통해 정부의 재정문제에 대하여 논의했다. 이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논의된 것은 인구세를 시행하고 공채를 모집하는 것이었다. 자발적으로 애국금을 받는 것도 논의되었으나 임시정부는 독립공채를 판매하기로 하였다.


독립공채는 중국 상하이와 미국 하와이에서 각각 원(圓)화와 달러화로 표시해 발행했다. 이 채권들은 상하이에서 4000만원(당시 환율로 계산하면 약 20만 달러), 하와이에서 25만 달러 등 총 45만 달러어치가 발행됐다.

3.1운동 이후 멕시코와 쿠바를 포함한 미주 한인들은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애국금, 인구세, 의연금, 후원금 등 다양한 이름으로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송금하였다. 직접 총칼을 들고 독립투쟁을 할 수 없었던 미주 한인들은 독립운동 자금 모금에 치중했던 것이다. 임시정부의 재정은 중국의 장개석 정부와 소련의 레닌으로부터 받은 지원금을 제외하면 미주 한인들의 성금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상해임시정부의 자료에 의하면 1919년 5월부터 1920년 12월까지 131,909달러의 예산이 사용되었는데, 수입으로 미주 한인들이 애국금 86,567달러, 충의금 14,487달러, 구미위원회 12,354달러로 등 총 113.408달러를 모금하여 전달하였다. 초기 임시정부 예산의 85% 정도가 미주 한인들의 성금으로 마련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19년에 10만 달러를 현재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약 200만 달러(한화 28억원) 정도로 계산되지만, 그 당시 미국내 노동자들의 평균 주급이 25달러였던 것을 감안하면 열악한 노동환경에 처해 있었던 미주 한인들에게 그 실제 가치는 훨씬 더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동완/코리안리서치센터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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