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못되면 조상 탓

2008-02-07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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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춘(Fairfield Trade)

요즘은 흔한 말이 아니지만 ‘못 되면 조상 탓’이라고 세상사가 꼬이면 애꿎은 조상들만 원망하였다. 그리고 멀쩡한 산소를 파묘하고 조상들의 유골을 짊어지고 새로운 명당을 찾아 이장(移葬)하였다.

고국에 들를 때마다 선산에 성묘를 하고 온다. 초등학교 시절 추석명절이면 아버님 따라 선조의 묘소가 있는 고향의 산골짝 풀숲을 헤치며 5대조 큰 산소부터 고조, 증조, 할아버지 산소까지 두루 사방 오륙십리 길을 이틀 일정으로 걸어다녔던 기억이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엊그제일처럼 새롭다.일제 말기 집안에 몰아쳤던 재앙을 또다시 면하기 위하여 종중(宗中)의 선산이 있음에도 나의 아버님도 조부모님의 유해를 풍수의 말만 믿고 이리저리 이장을 하신 결과이다.


떠나온 고국은 도심을 벗어나 시골 어느 곳이나 옛날에 비하여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은 아산자락을 내려와 경작지 모퉁이, 심지어는 밭농사를 짓는 밭 한가운데에도 묘지를 쓴다. 전국의 명당이란 자리는 옛 사람들이 다 차지하고 누었으니 이제는 빈 자리만 있으면 아무데고 묘를 써야하는 지경에 다달았다. 풍수지리 따라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 현무(玄武) 주작(朱雀) 찾으며 묘자리를 쓴다는 것은 옛 이야기이다.

21세기로 향하는 우리의 사고방식에 고국의 장묘(葬墓)제도도 개선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러나 지난번 대선 때 각 언론사는 유력 후보자들의 선영 묘지를 유명하다는 지관(地官)을 대동하고 샅샅이 훑어 보도하며 그들의 산소자리를 칭찬하였다. 일반인들은 알아듣기 힘든 전문용어를 동원하여 애매모호한 추측을 두리뭉실하게 늘어놓았다. 몸보신으로, 천기누설하면 안된다며 누가 대통령이 될 쪽집개 점괘는 피하고.

명당(明堂)이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선친의 유해를 이장하고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은 조상의 은덕을 받아 발복(發福)하고픈 사람들에게 고무적인 사건이었지만 지난번 대선에 임하여 선친의 묘소를 또 이장한 분은 또 낙마를 하였다.투표 전에는 그 분의 새 산소가 천하의 명당이어서 어쩌구 저쩌구 하던 지관들의 해설은 물건너 가버렸는지 조용하기만 하다. 역대 대선 후보들의 이장(移葬) 역사는 이회창(1995, 2007) 김종필(2004) 이인제씨 등이 제왕(帝王)의 꿈을 안고 이장한 사실이 있다. 흥미 위주의 한국의 주간지에 유명한 재벌들의 흉사(凶事)를 나열한 기사를 보면 그 분들은 막강한 파워를 가지고 명당을 찾아 조상의 묘를 썼지만 그들의 가족사에도 액운과 불행이 찾아든 것을 보면 명당에 조상의 유골을 모셨다고 인간사가 형통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풍수에 관하여 한국에는 풍수지리학회가 있고, 어느 지방대학에서는 강의과목으로도 등장한 것을 보니 학문으로 대접을 받는 모양이다. 조상의 뼈를 명당에 묻으면 복 받고 부귀영화를 누리고, 관운 재운이 넘치고 양택(陽宅)이 명당위에 자리하면 무병장수하고 출세가 보장된다고 한다.
그들은 유명한 인사들의 생가는 진혈이 자리잡고 있다고 풀이하며 논리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사실은 과학이 아님에도 과학의 경지로까지 끌어 올린다.

세계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역대 로마 교황들도 부모 묘를 명당에 모셨을까? 세계를 호령하는 소련의 지도자들이, 미국의 대통령들이 유명한 지관의 안내로 조상 묘를 명당에 모셔 대통령이 되었다는 소문은 아직 들어보지 못하였다. 찾아 가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그들 조상들의 분묘는 한 평도 안되는 공동묘지에 비석 하나 서있는 평범한 묘지일 것이다.

미주에 사는 한인동포 후손들은 부모님의 유해를 안고 명당 찾는 수고를 면한 것만으로도 고국에 사는 국민보다 행복지수 한 가지를 더 높게 지니고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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