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케네디가의 새로운 비극

2024-10-02 (수)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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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가문은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로버트 F. 케네디 법무장관, 그리고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위원을 배출해낸 미국의 정치 명문가다. 이들 3형제는 지난 60년 동안 워싱턴 정가에서 최고의 명예와 권력을 누렸으나 동시에 자신들을 포함, 많은 가족이 불행과 비극을 잇달아 겪음으로써 ‘케네디 가의 저주’라는 말이 회자되는 불운과 비극의 표상으로 꼽혀왔다.

아일랜드 출신의 케네디집안은 증권투자로 거부가 된 조셉 패트릭 케네디가 일군 엘리트 가족이다. 조셉은 로즈와의 사이에 4남5녀를 두었으며 아들들을 미국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금권정치를 펼쳤다. 그런데 가장 촉망됐던 장남은 2차 대전에 전투기조종사로 참전했다가 전사했고, 둘째 존 F. 케네디가 대통령이 되는 꿈을 이뤘으나 암살당했으며, 셋째 로버트 F. 케네디 법무장관은 대선후보가 되어 유세하던 중 암살됐다. 넷째 에드워드 케네디도 대권을 꿈꿨으나 악명 높은 ‘채퍼퀴딕 사건’이 멍에가 되어 도전을 포기했다.

딸 2명도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장녀 로즈메리는 어린 시절 뇌손상으로 인한 정신장애 때문에 전두엽 절제술을 받다가 실패, 폐인이 되어 평생 요양원에서 살다가 사망했다. 차녀 캐슬린은 남편이 결혼 4개월 만에 전사했고 그녀 자신도 28세 때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다. 그리고 모두가 기억하는 바, 1999년 JFK 대통령의 외아들 존 F. 케네디 2세가 아내와 처형을 태우고 경비행기를 몰고 가다 추락해 39세에 사망했다.


한편 1968년 암살당한 RFK는 7남4녀를 두었는데 넷째 데이빗은 마약 과용으로 숨졌고, 여섯째 마이클은 스키 충돌사고로 사망했다. 또 손녀 중 한명이 약물 과용으로, 또 다른 손녀는 어린 아들과 카누를 타다 함께 익사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들 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비극이 끊이지 않았던 집안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 모든 불행한 가족사를 무색하게 만드는 ‘이상한 비극’이 최근 케네디가의 저주에 정점을 찍고 있다. 지금까지의 비극들이 죽음과 상실에 관한 것이라면, 새로운 비극은 정신과 가치에 관한 것이기에 가문에 더 큰 치욕과 불명예가 되고 있다. 2024 대선후보로 나섰다가 얼마 전 트럼프와 손을 잡은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이하 주니어) 이야기다.

케네디 집안은 전통적으로 민주당을 수호해온 가문이다. JFK와 RFK는 물론 테드 케네디 모두 민주당의 뿌리이며 상징과도 같은 거물들로, 민주당은 케네디 가족의 골수에 새겨진 정치이념이자 가치이기도 하다.

주니어도 처음에는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려 했지만 조 바이든에게 이길 수 없음을 알게 되자 탈당해 무소속으로 나섰다. 케네디가문에서는 노발대발하며 만류했지만 ‘미운오리새끼’ 주니어는 듣지 않았고 이때부터 가족과의 관계가 절연되다시피 했다. 한편 그의 아내 메리는 별거 중이던 2012년 52세 나이로 자살했다. 바람둥이 남편의 거듭되는 엽기적 성추문 행각 때문에 알코올 중독과 우울증이 심했다고 한다.

주니어는 출마 직후 케네디란 이름 덕분에 다소 관심을 끌었으나 각종 음모론을 신봉하고 푸틴을 옹호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관심권 밖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바이든이 사퇴하고 카말라 해리스가 민주당 후보로 지명된 후에는 지지율이 곤두박질쳤다.

8월 초 주니어는 해리스에게 각료자리를 주면 지지선언을 하겠다며 회동을 요청했지만 해리스는 응하지 않았다. 그런데 곧바로 트럼프가 내각을 조건으로 단일화 카드를 내밀자 이를 승낙, 대선후보에서 사퇴하고 공화당 캠프로 넘어갔다. 그러니까 이념과 정책은 아무 상관없고 오로지 권력만을 좇아간 불나방 같은 인간이라 하겠다.

RFK의 자녀들은 한 목소리로 ‘가문의 수치이며 배신’이라며 주니어를 비난하고 나섰다. 동생 맥스 케네디는 8월25일 LA타임스 기고문에서 “트럼프는 아버지가 지키고자 했던 모든 가치에 반하는 적”이라며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은 형이 우리가족의 가치와 어떤 접점도 보여주지 않는 트럼프에게 충성을 맹세한 것은 비극적인 일”이라고 개탄했다. 같은 날 누나 캐슬린을 비롯한 다섯 남매도 공동성명을 내고 주니어의 트럼프 지지를 비판하며 자신들은 해리스 부통령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RFK 주니어(70)는 하버드에서 문학과 역사를 전공했고 버지니아대 로스쿨을 졸업했다. 뉴욕시 지방검사보로 커리어를 시작, 환경운동을 벌여왔으며 페이스 법대교수로 재직한 적도 있다.

문제는 그의 기이한 사상과 행보들이다. 그는 총기규제에 반대하고, 백신 음모론과 9.11 음모론, 코비드 음모론을 적극 주장한다. 또 에이즈(AIDS)는 게이들의 마약이 원인이며, 트랜스젠더는 환경오염 때문에 나타났고, 러시아는 종전을 원하지만 우크라이나가 미국의 강요 때문에 억지로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정말 소름끼치는 것은 고래의 머리를 전기톱으로 절단해 차 지붕에 묶고 집으로 운반한 적이 있으며, 도로에서 발견한 새끼곰 사체를 뉴욕 센트럴파크에 유기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또 지난 5월에는 과거 자신의 뇌가 촌충에 감염되어 일부 조직이 파먹힌 뒤 심각한 기억상실에 시달렸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주니어는 트럼프 2기 정부에서 보건복지부 장관직을 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식품의약국(FDA)과 국립보건원(NIH), 질병통제예방센터(CDC)를 장악하기를 원한다고 최근 보수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공중보건의 전문지식과 경험이 없는 음모론자가 최고 위치에 앉을 경우 미국에 의료체계에 위기가 닥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트럼프가 당선될 경우 미국은 모든 면에서 위험해진다.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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