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뉴욕 서화(書畵)의 별, 더 높은 곳으로

2008-01-31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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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무남(뉴욕한인서화협회 고문/퀸즈 본보 통신원)

20여 년 전, 한성교회에 다닐 때 본 통신원은 그 곳에서 선비형 집사로 훗날 서화협회 회장을 역임했던 남현주씨를 만나 서로 정을 나누게 되었다.
알고 보니 그는 유명한 서예가였는데 그가 쓴 서예액자가 교회나 한인들이 많이 모이는 식당 같은 곳에는 없는 데가 없었다. 나와 동 연배인 그는 서예로 하루를 보내는 것이 유일한 낙이어서 부담 없이 쓴 작품들을 모두 곱게 표구해서 친지는 물론, 여러 주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을 보람이요, 전통 서예문화 보급에 절대 절명으로 여기면서 지냈다.

남현주씨는 지난 1986년도 본 통신원과 이웅용 선생, 당시 언론인 이형래씨와 뜻을 모아 뉴욕에 서예를 즐기는 한인들을 모아 친목 겸 여가선용을 하기 위해 모임을 갖기로 하고 그 해 11월 10일 플러싱의 당시 김삿갓 식당에서 ‘서예 동호인회’ 발족식을 가졌다. 출범당시 이 모임의 초대회장은 이웅용씨, 안성신 교수가 이사장이 되었다. 이 모임을 위해 방 두 칸을 무료 제공한 분은 당시 치과의사로 커뮤니티 활동에 적극 나섰던 오응환 박사.


이렇게 뉴욕한인 서예가들의 모임은 여러 뜻있는 사람들의 도움과 협조로 큰 부담 없이 출발, 회원들의 친목 겸 여가선용의 안식처로 자리 잡았다. 그 결과 불과 5개월 만에 20여명의 회원이 확보되었고 운영경비는 대부분 이병헌 당시 조선옥 사장을 통해 남현주씨가 담당했다. 그 첫 열매가 일주간 이웅용 선생의 개인전이었다. 이 모든 활동의 지원을 남현주씨는 늘 말없이 담당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발족 5개월이 되자 회원들이 계속 불어났다. 이제는 모여 친목이나 하고 글만 써서 안 된다는 생각에 서예 불모지인 이 땅에 이를 보급하고 자라나는 후세들에게도 우리의 문화를 전승시켜야 한다는데 뜻이 모아져 진일보한 ‘미주한인 서화협회’로 명칭을 바꾸고 사군자와 동양화 강좌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한인사회 각종 문화행사에 참가, 전시회를 하였으며 뉴욕한인회 주최 백일장도 후원으로 참가, 심사를 거쳐 시상하기도 했다. 남현주 회장은 또 한국의 ‘한국문화예술연구회‘와도 유대를 갖고 회원들의 작품을 보내 평가를 받게 하였다. 그 결과 협회는 10명의 초대작가와 6명의 추천작가, 그리고 3명의 찬조 작가를 배출하는 결실을 맺었다. 이와같이 서화협회의 역사를 지금 재조명하는 것은 지난 27일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본 협회의 초대회장 남현주씨의 열정과 헌신, 공로를 되새기기 위해서다. 눈을 감는 순간까지 미국에 한국고유의 서예보급을 위해 외길을 걸어왔던 그의 생애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이 땅에 길이길이 썩지 않고 남을 것이다.

주말에 회원들과 커피를 하며 담소도 하고 오후에 돌연 병원을 찾아가 돌아올 수 없는 불귀의 객이 되고 만 남현주 회장. 당신을 사랑하던 그 많은 제자들과 지인들은 어떻게 하라고 이렇게 매몰차게 돌아섰단 말인가. 하나님의 품안에서 부디 고이 잠드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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