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2008-01-30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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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주 영 <논설위원>


연말연시가 되면 여러 모임에서 한인사회를 위해 혹은 소속단체를 위해서 공로가 있는 사람들을 표창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장이 아니더라도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수고하는 사람들이 많은 단체나 커뮤니티인 경우 훌륭한 조직이나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뉴욕의 한인사회 이민역사가 어느덧 50년 가까이 접어들었고, 오늘날 미 동부지역의 뉴욕일원에만 40만 명이 넘는 한인들이 거주하게 되었다. 삼 사십년 전만 해도 한인들이 거의 없어 길가에서 서로 스치기만 해도 너무 너무 반가워 같이들 인사하고 통성명했다는데 지금은 한국인끼리 서로 만나도 인사하는 일이 거의 없다. 플러싱이나 뉴저지 한인 밀집지역에서는 오히려 미국인(?) 보기가 더 어렵다고 하는데 이 말이 사실이 아닌가 싶다.


지금은 뉴욕시내 어디에서건 조금만 움직이면 한국산 식품들과 토종음식을 구입할 수 있다. 한국인의 대형 수퍼 체인마켓도 전국적인 규모로 미 주류시장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청과상이나 그로서리, 세탁업소, 그리고 생선가게나 네일 가게 같은 특정 비즈니스는 한인들이 거의 장악하고 있다. 1.5세, 2세들도 변호사, 엔지니어, 의사, 금융인 등 각 분야의 전문가로 계속 진출하면서 주류사회의 일원으로 속속 자리 잡고 있다.

오늘날 이민역사 반세기 만에 이렇듯 미국 내에서 인정받고 자리 잡은 민족은 우리 민족 외에 또 다른 민족은 없다고 한다. 그 결과 한인사회는 연방의회로부터 소수민족 중 유일하게 매년 1월 13일을 ‘한인의 이민의 날’로 제정받기도 했다. 이와 같은 번성이 있기 까지는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그동안 뒤에서 헌신하고 땀 흘려 일한 우리의 선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인사회에는 아직도 빛도 없이 소리도 없이 남몰래 봉사하고 헌신하는 사람들이 곳곳에 많이 있다. 얼마 전 세상을 뜬 스태튼 아일랜드의 수지 바이델 여사가 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녀는 73세에 생을 마감했지만 살아생전 그녀가 피운 꽃의 향기는 그의 도움을 받은 한인들 가슴 가슴에 여전히 향기롭게 남아 있다. 한국전 참전 미 용사와 결혼한 후 그리스도 사랑의 정신으로 지난 35년 동안 미국에 갓 이민 온 한인들의 새로운 정착을 위해 필요한 학교입학이나 취업 등 제반사항 등을 영어로 도와주고, 어려운 사람들이 있으면 무조건 나누면서 살았던 수지 여사. 그의 생은 한마디로 빛도 이름도 없이 말없는 희생과 봉사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삶이었다.
미국에 먼저 온 이유만으로 한인들을 위해 하나의 등불, 지팡이가 된 사람들이 어찌 우리 사회에 수지 바이델 여사뿐이랴!

가정문제연구소의 고 염진호 여사는 일생을 한인사회 가정의 화목을 위해 봉사하다 과로로 숨졌다. 하지만 그의 정신을 이어받아 후배들이 계속 일하고 있고, 뉴욕한국학교의 허병렬 현 교장은 지난 35년 동안 오직 한인 2세들의 한국어교육 및 보급에 영원한 젊음을 불태우고 있다. 이와 같이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노력, 그리고 뼈를 깎는 아픔과 고통, 뜨거운 가슴과 사랑의 눈물이 바로 우리 한인 커뮤니티를 받치는 기반이 된 것이다. 이러한 정신이 이어져 민족혼의 불꽃이 꺼지지 않는 한,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는 것이다. 물론, 꼭 그렇게 훌륭한 사람만 우리 사회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방도시에 가면 50년대에 이민 온 한인들 중에 평생 자신을 일본사람이라 속이고 일본인과 같이 행세하며 사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고 한다.

일본의 식민지 출신에다 한국전쟁 등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룬 한민족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부끄러워 그런다는 것이다. 또 미국에서 뼈아프게 고생해서 성공한 한인 중에는 백인사회에 자랑스러운 일원이 되어 한인사회에서 아무리 모시려고 초청을 해도 ‘엽전들’이라며 상대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요즈음은 한인들 사이의 불신감도 어느 때 보다 크다고 하는데 꼭 불경기만은 아닌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초기이민자들을 돕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등쳐먹고 사기 치는 사람들이 많아 동포애는 커녕, 한인기피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래서 이민 왔다가 고생 고생하다 알거지가 되어 고국으로 돌아가는 한인들도 없지 않다. 그러나 지금도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동족을 도우면서 묵묵히 봉사하고 헌신하는 ‘다수’가 있기에 한겨레가 오대양 육대주로 뻗어나가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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