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왕따

2008-01-26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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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원(자유기고가)

불혹의 나이를 지난 마흔 셋이 되는 해부터 25년간 몸을 담고 있던 단체에서 탈퇴를 했다. 내년이면 칠순이 되는 나이에 상대방 측에서 볼 때는 소위 ‘왕따’를 당한 것이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주위로부터 따돌림을 받는다는 건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꽃봉오리도 제대로 맺기도 전인 어린 나이에 슬픔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고 작년 경천동지할 참사로 세상을 뒤흔들었던 ‘조승희 사건’도 터지는 것이다.영국의 ‘철의 여인’이라 불리는 마가렛 대처 전 수상의 아버지가 딸인 대처에게 한 말이 생각난다. “따돌림을 받을까 두려워서 집단에 맹목적으로 따라가서는 안된다. 네가 할 일은 네가 스스로 결정을 해야 한다”고 했다.이 금언은 대처 수상이 평생동안 간직한 인생철학이 되었다고 한다.


누구나 삶을 살면서 한 두번쯤은 따돌림을 받게되는 경험을 한다. 누구를 막론하고 소위 ‘왕따’를 당하는 경우 따돌림이 주는 고통은 결코 작지 않다. 그렇다 하더라도 “따돌림 당하는 것을 두려워 말고 스스로 당당히 행동하라”는 충고이다.불의를 보고도 못 본체 하며 사는 삶은 정의롭지 못한 삶이다. 아무리 다수의 의견이 지배하는 체제에서 사는 세상이라 할지라도 진실이 왜곡되고 정의롭지 못한 다수에 고개를 숙일 수는 없지 않은가! 다수결에 의한 결정을 내려야만 할 때가 있고 또 다수결에 의해 처리할 사안들이 있지만 무조건 다수의 결의라는 이름으로 긴 세월을 이어온 인연을 끊고 인민재판식 처단을 감행해서는 안된다.

코드가 맞는 사람끼리 모이면 무서운 위력을 발휘하는 힘이 생긴다.
같은 물에서 오랫동안 놀다가 수질이 나빠져서 그 바다에 뛰어들지 않는 것은 엄격히 따지면 ‘소외당하는 것’이 아니다. 중이 절을 떠나는데 어찌 ‘왕따’라고 할 수 있겠는가! 따돌림을 자초하는 것이라고 표현해야 마땅할 것이다.사형수도 대통령이 사면권을 발동하여 사형 집행을 중단하기도 하고 징역형 판결을 받은 죄수에게도 실형을 면제받는 법이 왜 있겠는가. 특별한 이유 없이 ‘코드’가 안 맞는다고 폭력을 휘두르는 작태를 벌이는 폐단이 반복되어서는 안된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우리 주위엔 곱고 말간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 꽤 있다는 것이다.어제가 있었기에 오늘이 있고 또 내일이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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