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나의 새해 결심

2008-01-23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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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돈(법정통역)

일찍부터 영어를 원어민 사회에서 배운다는 목적으로 조기 유학이 유행하기 시작되더니 이제는 거의 모든 한인가정에서 치르고 있는 새로운 일반 사회현상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나는 일찍부터 조기 유학에서 오는 부작용 때문에 상당히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나의 직업이 한국어와 영어를 넘나드는 이중언어 구조에서 살고 있다보니 남달리 예민하게 이런 것들을 느끼게 되는지 모르겠다.우선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최근 뉴욕주 법원의 한국어 통역 자격 시험에 많은 사람들이 지원을 했는데 그 중에는 아주 우수한 영어 구사 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불합격된 지원자가 많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들은 놀랍게도 영어가 아니라 오히려 한국어에 서툴러서 불합격되었다는 것이다.


법원의 통역이라 해서 법률 전문지식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고 다만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는 법률용어 정도의 대화 내용인데 이것을 한국어로 옮기는 실력이 모자란다는 것이었다. 특히 우리의 법률관계 용어는 거의 모두가 한자(漢字)를 이해하지 못하면 알아들을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이들 한국어에 서툰 지원자의 대부분이 젊은 연령층의 조기유학 출신들인 것 같은데 이들은 한국에서 학교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한국어 어휘의 이해에도 부족할 것이고 더구나 한문이 뒷받침이 된 용어에는 더더욱 이해가 부족할 것이기 때문이다.

영어와 한국어 모두를 완벽하게 구사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가 이곳에 40년을 사는 동안에 이 두 가지 언어 모두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사람을 만나본 것은 지극히 소수에 속한다. 당연히 두 가지 언어 중에 어느 한쪽이 모국어(Mother tongue)이고 다른 하나는 부차적인 격으로 사용되는 것이 대부분인 것 같다. 특히 한국어나 일본어 같은 아시아권 언어에서는 더더욱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는 것 같다. 조기 유학생들에게는 이제 영어는 본국어이고 한국어가 제2 외국어가 되는 경향이 되는 셈이다.

제2 외국어로서 한국어로 된 신문과 전문 서적을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 되려면 한국에서 대학 수준의 교육이 필수적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지금 이곳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 조기 유학생들은 초등학생을 비롯해서 고등학교 과정도 한국에서 마치지 못한 학생들이 대부분인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들 조기 유학생들은 앞으로 영어에는 유창해질지 모르나 한국어는 일상 대화만 나눌 수 있는 정도의 수준에 멈출 가능성이 절대적이다. 그래서 이들이 앞으로 한국 사회에서 일할 수 있는 인재로서는 부적격 판정을 받을 것이 뻔한 노릇이므로 지금부터 이에 대비한 준비를 하지 않으면 조기 유학생들에게는 이들의 장래를 망칠 수 있는 심각한 문제로 대두될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조기 유학생과는 전혀 반대 방향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 가족이 있다. 나에게는 미국 변호사 자격으로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딸이 있다. 이 딸 역시 한국에서 초등학교 6학년 밖에 다니지 않고 이민을 왔기 때문에 당연히 그의 정착지는 미국이었고 한국어라고 해야 일상의 대화 수준을 넘지 못하기 때문에 한국인으로서 한국에 정착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그의 아들이 한국에서도 외국인학교에 다니고 있는지 10년이 되었다. 이제 고등학생이 되는 손자 아이가 크리스마스를 전후해서 다녀갔다. 한국에 살다 보니 한국어 구사는 가능한 모양이지만 아무래도 영어가 편한지 주로 영어를 쓰는 경향이 있어 보인다. 그러니까 이곳에서 내가 느끼는 조기 유학생과 전혀 반대 방향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물론 학교에서 한국어도 가르치고 있고 한국어 책도 읽는 모양이지만 별로 신통해 보이지 않는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손자 아이에게 심각한 약속을 요구했다. 한국어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한국어 책을 읽을 것을 권했다. 그래서 그의 수준에 맞는 책을 내가 찾아서 손자 아이가 이를 읽도록 압력을 행사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나는 이제 거의 매일처럼 한국의 온라인 서점에 손자에게 추천할 한국어 서적을 뒤지는 일과가 하나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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