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력서

2008-01-12 (토)
크게 작게
나정길(수필가)

일자리를 원하는 이들은 이력서를 써 본 경험을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력서에는 얼마나 공부를 했고, 어떤 일을 하였으며 어떤 경험을 쌓았으며 어떤 출신이라는 자기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다. 보는 이들은 자기 필요대로 보고 나머지는 쓰레기통에 버릴지 모르나 이는 자기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정성의 작품인 것이다.

한국에서 이력서를 쓰는 것과 여기 미국에서 쓰는 양식이 조금 다른 것이 퍽 흥미롭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한국에서는 출생지명에서부터 시작하여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 졸업까지 연대별로 기록하고 경력은 모든 것을 다 동원하여 빼곡히 적어넣는다. 그리고 ‘위의 기록은 사실과 상위 없읍을 증명함’이라는 서약까지 하고 끝을 맺는다.
누구의 발상이며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나 한국의 이력서에 출생지명을 꼭 넣게 되어 있고 남녀의 구분과 사진까지 꼭 붙이게 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들이 사람을 골라 쓰겠다는 입장에서는 도움이 될 지 모르나 어떤 특정한 지역 출생은 처음부터 배제해 버리는 그릇된 편견을 가져왔다. 이 편견은 한국의 사회, 경제, 정치에 치유하기 어려운 고질병을 만들어 놓았다.


이력서의 출생지명이 그 인격을 가늠하는 중요한 자가 된다는 것을 경험한 이들은 눈물나도록 알고 있다.이력서에 사진 첨부는 특히 여성일 경우에 용모단정을 우선으로 뽑겠다는 악습으로 이용하고 있다. 면접과정을 통해 그 사람의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나 전체적인 인격을 먼저 평가하고
가늠하지 않고 용모단정을 우선하겠다는 편견은 많은 잘못을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다.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이들은 이력서를 제출할 때부터 주눅이 든다. 웬만한 직장에서는 대학을 나오지 않은 이는 면접에서부터 제외시켜 버리는 것을 많은 이들이 경험했을 것이다.

학벌 중시의 한국의 고질병은 많은 분야에서 학력위조를 하였다가 거짓으로 밝혀져 망신을 당하는 촌극이 벌어지고 있다. 자기의 재능으로 예능계에 두각을 나타낸 사람의 경우는 구태여 학력을 따질 것이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많은 이들 앞에 거짓을 말하는 것이 문제이고 거짓을 말하는 이가 가르치는 위치에 있다면 더 심각한 문제일 것이다.
미국의 이력서는 일정한 양식이 없이 자기가 지원하는 회사를 설득할 수 있는 자기 PR이라는 것이 퍽 재미있다. 경험이나 학력은 가장 최근 것부터 기록해 간다는 것도 합리적인 것이다. 그리고 미국의 이력서에는 국적, 성별, 나이, 가족상황 등을 적지 않게 되어 있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몇십년 전에 어디에 살았고 무얼 했느냐 보다 얼마 전에 어느 직장에서 어떤 경험을 가졌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미국 공부 많이 하고 고국에 돌아간 이들도 많을터이니 한국도 새롭게 달라졌으리라는 바람이다.우리들의 인생 이력서는 어떻게 써야 할까. 어느 잡지에 글 쓴 이의 이력이 책 한쪽을 다 덮도록 빽빽히 적혀있다. 다른 이들은 그것을 다 읽어주지 않을 것이다.먹고, 자고, 일하고, 공부하며 그리고 무엇을 했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 이력서에 들어갈 기록으로 남는 것 아닐까.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선하게 살았느냐, 거짓으로 살았느냐, 그럭저럭 살았느냐, 열심으로 살았느냐 하는 점이 인생 이력서에 기록될 지도 모른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