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래도록 그리울 시간들

2008-01-12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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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업(필라델피아)

며칠 전, 옛 직장 상사였던 어른께서 고희를 맞아 살아온 날들을 책으로 출판하여 한권을 보내주셨다. 월남전에 한국 전투부대인 맹호사단이 파병되던 때 서울에서의 첫 직장이었다. 어른께서는 한 직장에 입사하셨고 그 회사에서 정년을 맞았다.참으로 오랫동안 까맣게 잊고 있던 나의 살아온 날들을 새삼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고 야릇한 향수를 느꼈다.

책장을 넘기면서 인간의 순수한 삶이란 지극히 아름답고 행복한 것이란 것을 알았다. 그러나순간마다 자신의 순수한 삶을 아름답게 느끼지 못하는 것은 부질없는 인간의 욕망과 미래에 대한 무의식적인 불안이 섞여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사실 무심히 스치고 지나면 모르지만 자세히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시간속에 걸어가는 인간 대열에는 추하고 고통스럽고 허탈함과 배신, 분노와 절망을 만들었던 일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곳에는 우리가 만나보고 싶은 아름다운 얼굴들이 수없이 많고, 그들과 더불어 만들었던 그리운 시간들, 오래도록 머물고 싶었던 시간들이 쌓여있기도 한 것이다. 세대에 따라 시간은 다르다. 이제 우리는 날이 가면 갈수록 더욱 바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시간은 어떨 때는 땅에 기어가는 벌레같이 느릿느릿 가기도 하고 어떨 때는 화살처럼 쏜살같이 날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인생에서 빨리 가거나 늦게 가거나를 생각조차 하지 않는 때가 제일 행복하다”


명작 뜨르게네프의 ‘부자’(아버지와 아들) 소설에서 아들에게 들려주는 아버지의 말이다. 세대 차이에서 일어나는 일을 긴 인생을 살아온 경험에서 나온 말이리라!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모래시계에서 모래가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시간의 흐름을 육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을 느끼고, 그것을 우리들의 삶에 주어진 짧은 인생의 시간과 비유한다.어느 사이에 모래가 병 아래쪽으로 모두 다 흘러내려 모래시계는 죽음과도 같은 정적을 유지하
고 있다. 신이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발견하게끔 한 것은 아마도 “오류 속에 진실이 있고, 그림자 속에 태양이 있다”는 사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이러한 모순된 사실을 일찍 깨닫고 의연하게 시간과 싸우면서도 감상에 젖지 않고 자기를 절제하며 어둠속에서 계속 빛을 찾는 사람은 시간과 싸워 늙어도 추하게 보이지 않고 원숙하며 더욱 더 큰 인간의 위엄을 보인다는 것을 나는 가끔 발견한다.새해가 시작되었다. 누구나 차별 없이 일년이란 새로운 시간을 가지고 살아갈 것이다. 시간의 한계를 똑바로 인식하고 그것을 담담하고 용기있게 받아들이는 자세만이 역설적으로 자신의 참
모습과 인간의 가치를 영원히 지키는 길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고희 문집을 보내주신 어른께 답신을 서둘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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