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버지의 틀니

2008-01-15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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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태(시인)

치과의사가 된 조카가 의사 된 기념으로 제 할아버지 틀니를 해 준다고 여러 날 전에 맞추어 갔던 틀니가 도착했는데 정작 틀니를 할 사람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세상 짐을 훌훌 내려놓고 떠나신 분은 내 아버지다. 아버지가 쓰시던 책상 위에 새 틀니가 앉아 아쉽다는 표정으로 주인을 찾지만 주인은 돌아오지 않는다. 가신 지가 얼마 되지 않으셨으니 목청을 돋구어 큰 소리로 부르면 새 틀니를 가지러 오시진 않으시려나? 내 마음을 때린다.

옛 말에도 이빨이 좋지 않으면 단명하고 이가 튼튼하면 오래 산다고 했다. 당연한 말이다. 음식을 잘 씹어 넘기면 소화기관에도 좋고 영양 섭취에도 훨씬 좋다고 하기에 나이가 많이 들어 다 빠진 이빨 대신 틀니라도 사용해서 건강하게 오래 사시기를 바랬다.이에도 표정이 있다. 억울하고 원통한 것을 가슴에 꾹꾹 눌러 간직하고 사는 사람은 어금니를 꽉 물고 참다가 자면서 이를 갈고, 마음이 밝고 명랑한 사람을 보면 누런 이도 희고 예쁘게 보일 뿐만 아니라 정신이 건강한 사람을 보면 이빨도 더 희고 건강하게 보인다. 웃으면서 보이는 하얀 이를 보고 물고 씹는 일을 맡은 것이 이빨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버지도 그러했다. 아버지의 세상사는 깊은 속이 고와서 그랬는지 아버지의 이빨은 언제나 고왔다. 마음 따라 표정 따라 달라지는 이빨의 표정, 그런 이빨도 입을 다물면 입술 뒤에 기대어 표정을 내리고 쉰다. 이 때가 되면 이빨도 잡다한 생각에 잠겨 씹고 싶었던 사람도 잊게 되고, 씹히던 외로움도 잊게 된다. 잡다한 생각에서 하나 둘 생각나는 일들, 부담없이 떠오르는 이런 생각들이 없다면 먼 길 가는 인생들이 무슨 힘으로 그 먼 길을 갈 수 있을까? 씹는 일이 천직인 이빨도 긴장하거나 고단하다가도 쉬어 가고 싶은 마음을 잡다한 생각에다 내려놓는다. 사는 것이 다 그런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에 가족관계가 무너지고 가정경제가 무너지면 참을 수 없을 만큼 마음이 아프다. 멀쩡하던 정신이 상처를 받으면 갈피를 잡지 못하도록 고통을 받는 것처럼 이빨이 아프면 신체 어느 부위의 고통보다도 아프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만큼 고통스러워 곧바로 치과병원으로 가지 않으면 아니된다. 아픈 치아의 신경치료를 하거나 아예 신경을 제거해야 한다. 치료가 가능하지 않으면 아예 이빨을 빼야하기도 한다.
사람 사는 것이 다 그렇다. 마음에 온 상처들을 치료하는 데에는 잊는 것이 제일이고, 정신에 온 상처의 치료는 대화로서 푸는 것이 상책이다. 아픔에는 처음부터 발을 들여놓지 말아야 하지만, 기왕에 찾아든 마음 속의 아픔을 지우거나 잊어버리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정신을 쿡쿡 찌르는 아픔을 단념이나 용서로 풀면 정신에서 사랑하고 싶은 의지가 생겨난다. 밉다고 씹기만 계속하면 이빨은 상한다.

죽었다 깨어나도 상해서 한 번 빠진 이빨은 다시 나게 할 수는 없다. 누구에게나 아픔과 고통과 상처받을 위험성은 있으나 나에게 온 고통과 아픔, 그리고 상처를 씹는다면 씹히는 사람이 손해가 아니라 씹는 사람 마음의 이빨이 손해다.이웃사촌처럼 사이좋게 나란히 줄을 선 이빨들, 여럿이 모여있으나 단순해서 좋다. 하나를 씹는 작업에 모두가 동원되어 협동하는 이빨들, 곁가지 없이 하나가 되는 흰 모습이 좋다. 아버지의 인생이 그러했다. 가난한 한 가정과 칠 남매의 성장과 뒷바라지를 위해서 온몸이 하나가 되어 동원되었다. 힘든 노역에서 오는 고달픔도 있었겠고, 말단 공무원이란 직업에서 오는 비애와 저승으로 아내를 먼저 보낸 후 온몸이 시린 외로움도 있었을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이런 저런 일들을 남몰래 씹느라고 성하던 이빨이 다 상했는지 아버지의 이빨은 일찌기 다 빠졌지만 그래도 씹을 것이 있으면 틀니라도 사용해 잘게 씹으면서 오래 사시기만 바랬다.

누구나 아버지를 떠올릴 때에는 아버지의 능력을 말하지 않고 아버지의 능력따라 아버지의 등급을 매기지 않는다. 아버지는 그냥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오래 씹어 망가진 틀니를 새 것으로 바꾸어 주겠다고 치과의사가 된 손녀가 만들어준 틀니, 아버지가 쓰시던 헌 책상 위에 씹을 일 없이 허전하게 앉아 다시는 이 세상에 오지 않겠다며 떠난 주인의 보이지 않는 먼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다. 저승에서도 씹는 일은 있을터인데 거기에도 치과의사는 있을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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