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꿀벌 장례식

2025-09-19 (금) 07:09:30
크게 작게

▶ 유양희 워싱턴 문인회, VA

구월이 오고 햇빛과 바람의 온도가 달라지니 비로소 가을이 오는 것 같다. 계절과 관계없이 꽃이 피면 벌들이 반가운 방문객처럼 찾아오기 마련이다. 겨울에도 동백꽃이 피니 벌들이 추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주변을 분주히 맴돌던 지난겨울을 생각한다. 만물이 상생의 관계를 유지해야 생존할 수 있음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몇 년 전 꿀벌 살충제 사용에 항의하는 사람들이 파리 중심가에 모여 꿀벌 장례식 퍼포먼스를 한 적이 있다. 이 모의 장례식은 인간의 생존이 꿀벌의 운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상기시켜 준 행사였다.

꿀벌 애호가였던 엘리자베스 2세 (1926-2022)가 서거했을 때는 궁정 양봉가가 버킹엄궁에서 기르고 있던 수만 마리의 꿀벌에게 여왕의 죽음을 알렸다. 벌통 주위에 검은 리본을 달고 일일이 벌통을 조용히 두드리면서 꿀벌들에게 여왕의 사망 소식을 전했고, 이젠 새 주인인 찰스 3세가 그들을 잘 돌봐 줄 것이라고 속삭였다.


이렇게 꿀벌에게 주인의 죽음을 알리는 행사는 유럽의 양봉가들이 해온 관습이다. 여왕의 양봉가가 그랬듯이, 집안 가장의 죽음을 벌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벌들이 벌통을 떠나거나 꿀 생산을 중단하거나 죽는 일이 일어난다고 굳게 믿고 있다.

양봉가들과 환경 운동가들은 꿀벌이 급속도로 사라지고 있는 원인을 살충제, 기생충, 지구온난화 등이 주요 원인이라고 보고 있다. 특히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상이변으로 꼽는다. 겨울이 더 따뜻해서 꿀벌이 겨울잠을 자지 않고 생활하다가 수명 단축으로 겨울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버티지 못하고 중간에 죽는다는 것이다.
전 세계 식량의 90%를 차지하는 100대 농작물 중에서 70% 이상이 꿀벌과 같은 화분 매개 동물의 수분 활동 도움을 받아 생산된다고 한다. 또한, 벌은 다양한 식물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생태계의 균형을 유지해준다.

이처럼 벌은 수분 매개체로서 식물의 생존과 번식에 필수적인 역할을 하는 동시에 그 식물에 의존하는 다른 동물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렇게 인간의 생존과 생태계에 직결되는 꿀벌이 사라지면 어떻게 되는 걸까?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은 “벌이 멸종한다면 인류는 4년밖에 더 못 살 것이다. 벌이 없으면 꽃가루받이가 없고, 식물이 없고, 동물이 없고, 사람도 없다.”고 극단적인 예언을 했다는데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전혀 터무니없는 말이 아닌 것 같다. 이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 작가로 선정된 바 있는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꿀벌의 예언 1』에서 언급한 내용이기도 하다.

한국인이 애호하는 토종꿀도 사라지는 위기에 놓여있다. 빈 벌통들을 모아 불태우면서 양봉업이 생업인 가장들이 눈물을 글썽이며 막막해하는 모습들을 유튜브로 보면서 참 안타까웠다.

2013년에 한국인 최초로 꿀벌동물병원을 개설한 ‘정년기’ 수의사가 있다. 꿀벌만 전문으로 치료하는 수의사이며 아픈 꿀벌이 있는 곳이라면 전국 어디든지 달려간다. KBS와의 인터뷰에서 정 원장은 “벌이 살 수 있도록 환경 여건을 만들어줘서 우리가 서로 공존, 공생해야 한다는 배려와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벌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나는 벌만 보면 무서워서 곧바로 살충제로 제거하곤 했다. 10여 년 전 봄에 피크닉을 갔다가 벌에 쏘여서 순식간에 오른손이 퉁퉁 붓고 벌침의 독이 퍼져서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젠 갖가지 꽃들 사이를 분주히 드나들면서 꽃가루를 부지런히 옮겨주는 벌들이 새삼 고맙다.

마음이 바뀌니 생각도 달라져서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벌들이 이젠 나를 먹여 살리는 도우미로 여겨진다. 이제부터라도 우리 모두 벌을 조심하되 귀히 여기고 보호해주면서 더불어 살아야 하리라.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