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호박 죽 이야기

2025-09-19 (금) 07: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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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영순 메리옷츠빌, MD

“안젤라 언니, 아침에 텃밭에 나가 보니 하루가 다르게 자라있는 덩치 큰 호박 덩어리 두개가 땅에 닿을듯 해서 받침대를 만들어 올려 놓았어요. 이 녀석들이 누렇게 늙은 호박이 되면 언니 집에서 맛있는 호박죽 끓여 먹어요.” 모바일 폰을 통하여 들리는 친한 성당 친구의 목소리다.

여름 내내 햇빛 쬐는 텃밭에서 부부가 정성껏 키운 갖가지 채소들을 쇼핑백에 가득 담아 차 뒷 트렁크에 넣어 줄때마다 “염치없이” 받아 먹기만 했던 나로서는 가을이 오면 한번 집으로 초청하여 내 특기인 호박 죽을 만들어 대접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호박 반찬이라면 눈길 한번 주지 않았던 어릴 때의 내 편식 습관이 문득 떠오른다. 그때는 몸에 좋다는 밥에 섞여있는 콩이며, 반찬에 나오는 파, 고추도 하나씩 골라내어 버리는 내 모습을 보다 못한 엄마의 잔소리를 그때는 왜 귓등으로 흘려버렸는지…. 이제 나이가 들고 보니 이런 곡물과 나물들이 건강에는 다시없이 좋은 효자 노릇을 한다니 나이따라 변하는 신체의 변함에 경이로움을 느끼게 된다.
요즈음에도 마트에 가면 사시사철 앙증스럽고 예쁜 단 호박이 눈에 많이 띈다. 그 중에서도 초록과 노란 색갈이 잘 배합된 모양 좋은 놈을 골라 관상용으로 두기에도 좋고, 먹음직하기도 한 단 호박 한 덩어리를 골라 항시 집에 비치해 두기도 한다.
뭐니 뭐니해도 호박이 주는 이미지는 따스함과 포근함이다. 그 옛날 한국 시골 길을 걷다보면 마주치는 광경이 있으니, 집집마다 담장이나 초가 지붕위에 제 멋대로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호박 넝쿨은 저녁을 알리는 굴뚝의 연기와 어울려 푸근한 시골의 향수를 자아내곤 하였었다.


호박은 한 가지라도 버릴 것이 없다. 호박 꽃도 꽃이라고 연 초록 잎사귀 사이 사이로 벌과 나비가 날아와 꽃 속을 비집고 다니면 어느 사이 작은 호박이 싹튼다. 손바닥만한 잎은 쪄서 보리밥에 고기 한점 얹어 쌈장에 찍어 먹으면 한끼 식사는 거뜬이 해결된다.

작년 이맘 때쯤 큰 냄비에 옛날 엄마가 끓여 주시던 솜씨 그대로 팥은 삶고, 찹쌀 가루는 듬성 듬성 덩어리 지게 빚어 넣고 늙은 호박을 나박나박하게 썰어서 끓는 물에 넣으면 긴 나무국자로 쉴새없이 저어 정성스레 끓인 호박 죽을 이웃과 나누어 먹은 기억이 새삼스럽다.

비록 호박 죽 한 그릇이라도 이웃과 나누어 먹는 음식이 마른 가지에 단비를 뿌리듯 노년의 일상에 활기를 넣어준다. 며칠 전 성당 교우가 끝물이라고 쇼핑백에 가득 담아 넣어 준 오이고추를 말릴려고 따가운 가을 햇살에 부지런히 자리를 펴고 말린다. 빨갛게 물들어가는 고추가 계절의 변화를 알리는 전령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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