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두드리지 마라’

2008-03-07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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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휘(언론인)

성경은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라고 했다.하느님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고 부탁하고 믿는 마음이 있으면 만사가 해결된다는 유일신 신앙
의 핵심을 표현한 구절이다. 창조주 하느님과 구세주 예수를 믿는 기독교 신자로서는 이 한 마디가 구원의 손길이요, 희망의 등불이다.

노자는 이와 상반되는 말을 했다. “두드리지 마라, 문은 항시 열려 있느니라. 두드리는 마음이 곧 또 하나의 문을 만든다”고. 달마대사도 이와 비슷한 화두를 남겨 구도자의 마음을 인도했다. “구하지 마라, 구하면 구할수록 마음이 괴롭고, 구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有求皆苦 無求皆樂”어느모로 보나 상반되는 말이다. 2000년 이상 장구한 시간을 두고 오늘날까지 심오한 진리의 말씀이라고 믿어 내려오는 내용이 서로 엇갈리는 내용이라면 도대체 어느 쪽이 옳단 말인가?


그 중 하나가 옳으면 하나는 틀린 게 아닌가. 황희 정승의 말씀대로 너도 옳고 그도 옳다는 식의 판정을 내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잠시 묵상에 잠겼다. 눈을 떠보니 창 건너 저만치 바라보이는 용산 미군기지의 나무숲이 아까처럼 그대로 있다. 여름철, 활엽수 이파리로 뒤덮혀 그리도 무성하던 나무가 앙상한 뼈대만 남아있는 모습이 너무 판이하다. 그렇다고 그 나무가 아닌 것은 아니다. 분명 그 자리에 그 나무다. 맞다. 하나의 사물도 시절 하나 바뀌면 저리 달라지는데 우주의 진리를 설파하는 논리가 어찌 하나일 수 있겠는가. 똑 같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불도자의 수행도 시대와 토양에 따라 특색이 다르고, 같은 하느님을 믿는 가톨릭과 기독교도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지 아니한가.

나의 얕은 소견으로는 이렇게 정리하고 싶다. 어느 편이 옳고 그르다가 아니라, 접근하는 방식의 차이라는 것. 같은 물건 하나도 바라보는 위치와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일 수 있다는 것, 아무리 종교를 창시한 원조라 할지라도 인간의 모습으로 존재하였으니 그 사고의 영역은 많이 일치할 수도 있고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어찌보면 정 반대일 수 있지만 또 어찌 보면 같은 뜻의 반어법일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두드리라, 두드리지 마라’고 하는 표현은 어법은 같으나 그 배경에 숨은 뜻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가 말한 ‘두드리라’는 신앙의 대상에 대한 절대적 능력을 강조하기 위함이요, 노자나 달마가 말한 ‘두드리지 마라’는 인간 욕망에 대한 자제를 강조하기 위함이 아니겠나 싶다.그러니 결론은 양시론에 손을 들 수 밖에 없다. 그러니 문을 두드려서 당신이 믿는 하느님의 권능에 의해 구원을 받도록 하면 될 것이다. 성경의 말씀을 믿고 열심히 기도하며 하느님의 말
씀을 좇아 행하면서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존재의 의미를 찾는다면 그게 바로 구원이요, 사는 보람이 아니겠는가.

또 한편, 구하지 않은 생활, 욕심 보따리를 더 이상 풀어놓지 않으면서 자기 통제를 위한 수련을 쌓아감으로써 심화(心和)와 유유자적(悠悠自適)의 경지를 누릴 수 있다면 이 또한 세상을 자유인으로서 행복하게 사는 길이 될 것이다.세상은 양비론 보다는 양시론으로, 부정적 사고보다는 긍정적 사고의 편에서 판단하고 행함이 있을 때 희망과 결실과 발전이 있어 왔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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