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퀸즈 식물원 재방문

2008-02-27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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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준재(내과전문의)

오랫만에 퀸즈식물원을 찾아가고 있었다. 3년쯤 되었을까...
퀸즈식물원은 1939년 뉴욕의 세계박람회(New York World’s Fair)의 일환 사업으로 플러싱 메도우 팍의 대부분을 차지하다 1964년부터 현재의 39에이커 땅으로 옮겨와 연간 30만명의 방문객에게 “사람과 자연, 혹은 문화가 만나는 곳(Where People, Plants and Culture Meet)”으로 도시인들에게 자연 속에서 문화의 정취를 맛보게 해 주고 있다.

왜 하필이면 퀸즈식물원인가?
2001년 9월 11일 화요일 아침, 평화롭기만 하던 이 땅 미국에 전무후무한 사건이 일어났다. 9.11 테러다. 미국 본토가 공격받은 최초의 사건이다.
그토록 청명하고 구름 한 점 없던 그 날 아침, 초가을의 햇살은 뉴욕의 곳곳을 비추고 있었다. 누가 그런 날, 이스트 리버 강변에 우뚝 서서 미국의 상징으로 햇살을 받아 반짝이던 월드 트레이드 센터가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하리라 생각이나 했겠는가? 뒤따른 수많은 죽음과 장례 행렬은 미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인들의 가슴에 슬픔의 못을 박았다.어찌 우리 이 날을 잊을 수 있겠는가? 그 후 식자들은 종교간의 전쟁 혹은 문명의 충돌이라며 해석하기에 바빴다.


우리는 말이나 해석이 아니라 뭔가를 해야 했다. 슬픔을 나눠 가지면서도 슬픔을 다독거려주고 싶었다. 그것이 살아남은 자(者)의 책무(責務)같기도 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지역의 한인 60퍼센트 이상이 살고있는 플러싱 심장부에 있는 퀸즈식물원은 ‘자연과 문화가 만나는 곳’으로 우리에게 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사자(死者)들의 영혼을 진혼(鎭魂)하고 산 자(者)들의 가슴을 다독이며 갈등이라는 갈등을 모두 뛰어넘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퀸즈식물원은 우리에게 보내고 있었다. 그것이 인연의 시작이다.

이듬 해 2002년 5월 보슬비가 내리던 어느 날, 식물원 원장 수잔을 만났다. 보슬비에 옷 젖는 줄도 모르고 둘은 식물원을 걸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 후 9.11 테러 다음 날인 9월 12일에 ‘코스모스의 밤(Cosmos Night)’첫 행사가 열렸다.파아란 초록의 잔디 위에 하얀 텐트는 초가을 석양을 받아 초록은 더욱 초록으로, 흰색은 더욱 하얀색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죽은 혼을 달래듯 잔잔한 현악 4중주곡은 식물원의 잔디를 지나고 강(江)을 건너 맨하탄의 그곳으로 퍼져 나가는 듯 했다. 우리 아이들은 아름다운 한복을 입고 진혼 굿 하듯 북소리에 맞춰 두둥실 춤도 췄다. 참석자 모두는 인종과 색깔과 종교와 모든 갈등을 잊은 채 식물원의 초가을 저녁 노을에 묻혀가고 있었다. 다음 해도, 그 다음 해도 우리
는 그렇게 모였다.

그런데 3년만에 찾아간 식물원은 예전의 식물원이 아니었다. 카네기 재단과 블룸버그 시장의 지원으로 2007년 9월 27일에 준공된 신축 행정 건물이 서 있고 이곳 저곳 손보고 있는 식물원의 전면 보수작업이 나를 맞고 있었다.수잔을 다시 만났다. 툭 터진 창으로 새로운 모습이 눈에 확 들어오는 자리에 앉아 마시던 모닝커피의 맛도 맛이었지만 오고 간 우리의 대화 내용이 새 날을 맞는 아침 치고는 그리도 싱그러울 수가 없었다.
9월이 오면 우리는 예전처럼, 2002년 9월의 처음처럼 다시 그곳에서 만날 것이다. ‘코스모스의 밤(Cosmos Night)’은 그렇게 이어져 갈 것이고 언젠가는 우리 혼이 살아 숨쉬는 ‘한국 정원’(Korean Garden)이 인종을 뛰어넘고, 종파를 뛰어넘어 모든 갈등을 뛰어넘어 모두에게 평화를 심어주는 그런 날이 오겠지-. 나의 기도와 염원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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