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허상과 실상

2008-02-25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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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정길(수필가)

신문이나 잡지 또는 여러가지 문예지에 실리는 글을 보게 된다. 그 글과 함께 필자의 사진을 보면 퍽 흥미롭다.어떤 사람은 굳어진 얼굴로 증명사진 마냥 정면으로 찍었고 어떤 사람은 한쪽 귀만 내보이고 한껏 멋을 부려 옆으로 비스듬히 찍었으며 어떤 사람은 예쁘게 미소 짓고 어떤 사람은 자다가 일어난 것처럼 부시시한 모습을 보인다.

이 사진의 영상과 그 분의 실제 모습은 얼마나 다를까 하는 생각에 붙잡혔다. 어떤 사람은 칠십이 다 되었는데도 사진은 젊고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이다. 글 쓴 사람이 처음 문단에 오를 때 모습이 세월이 흘러 그 사람의 모습은 달라져도 사진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것은 아닐까. 그 한때의 모습이 지금과 달라도 우리는 그 사진 속에서 그의 이미지를 느끼고 인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수학시간에 칠판에 정삼각형을 그려놓고 세 변이 같고 세 각이 같다고 인정하고 수업을 한다. 정확히 실제와는 다르다 하여도 그 가설의 인정 없이는 다른 아무 것도 증명할 수 없게 된다.서양 미술의 팔등신 미인은 예술가의 이상적인 이미지를 형상화 시켰다고도 한다. 그림 속의
아름다운 몸매가 실제로 있든 없든 상관 없이 화가가 그려낸 그 영상대로 우리는 명화로 감상할 뿐이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실상이 아닌 것을 실상으로 착각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매일 영화나 드라마 속에 빠져 울고 웃는 경우가 있다. 정지되어 있는 한 장 한 장의 사진을 연속으로 돌려 활동사진을 만든 이래 영화는 오락의 수준을 넘어 예술의 경지에 이르고 있다. 그만큼 눈속임도 발달하였다. 무대 장치로 배경을 만들고 차 타고 떠나고 도착하는 모습으로 장소의 이동을 상상하게 한다.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는 도시나 바다나 하늘도 무대로 만들어져 있다.

최근의 영화나 드라마는 ‘컴퓨터 그래픽’으로 실제와는 더욱 멀어진 영상으로 우리의 시각을 즐겁게 한다. 우리는 본래 그러한 상상의 세계를 더 그리워하고 즐기는 것일지도 모른다.우리는 과거나 미래의 허상에 빠져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지금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은과거의 행복했던 시절을 회상하고 그리워한다. 지금이 어렵고힘든 사람들 가운데는 미래의 꿈이 성취될 기대에 부풀어 살아간다. 행복했던 추억이나 미래의 꿈을 가진 사람은 지금 불행하다고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실상이라 믿고 살아간다. 현실은 허상인 과거의 결과이고 불확실한 미래로 가는 과정이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 우리가 만나는 것 모두가 진실한 실상일까.우리가 애지중지하는 명품 가방이 가짜였다면 허상에 마음을 빼앗기고 살아온 것이다. 부부가 사랑으로 만나 몇 십년을 살았어도 그 마음을 다른 곳에 두고 있다면 허상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인생은 허상을 실상으로 착각하고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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