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대선의 찬밥신세 ‘불체자 문제’

2008-02-15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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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주필)

지난 1980년대의 불체자 사면 이후 미국내의 불체자 수가 계속 늘어나 1,000만명 대에 이르자 최근 수년간 이 문제가 미국사회의 큰 이슈가 되었다. 그리하여 부시대통령의 이민개혁안과 의회의 포괄적 이민개혁법안 등 불체자에 대한 사면조치가 어떤 형태로든지 이루어질 것 같은 희망이 보였다. 그런데 미국 대선운동이 시작된 지난 해부터 이같은 희망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버리고 오히려 불체자 단속만 강화되고 있다.

지난 해 이민세관단속국은 미국내 직장을 급습하여 불체자 5,000여명을 체포했다. 그 전에는 직장에서 체포된 불체자가 연간 1,000명 수준이었다. 불체자 전담 단속반도 2005년 18개 팀에서 2007년에는 75개 팀으로 늘었다. 올 들어서는 단속을 더욱 옥죄고 있다. 국토안보부는 앞으로 불체자 고용을 강력히 단속하여 불체자를 고용한 업주를 형사처벌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부시행정부는 2009년도 예산에 불체자 단속과 밀입국 방지 예산을 대폭 증액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런 가운데 미국의 최대 사회문제인 불체자 문제가 대선 이슈로 부각되지 못하고 있다. 오바마와 힐러리, 공화당의 매케인 후보가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지 불체자 구제조치를 강구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국경 경비강화 등 밀입국 방지와 단속에 더욱 역점을 둔다. 그리고 모두 이 문제를 핫 이슈로 삼지 않는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왜 이렇게 불체자 문제가 찬밥 신세인가. 그것은 불체자가 힘이 없기 때문이다. 미국내 1,200만의 불체자는 선거에서 단 한 표의 힘도 없다. 미국에서 주류를 이루는 백인 안정층 가운데는 불체자들이 미국 재정에 부담을 주고 미국인의 삶의 질을 떨어뜨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불체자 단속을 원한다. 대선주자들이 여론을 의식해 불체자 문제에 관심을 표시하기는 하지만 노골적으로 불체자의 편에 섰다가는 많은 표를 잃기가 십상이다.

그러면 소수민족 출신의 유권자들이 지지해 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도 않다. 투표를 할 수 있는 소수민족 유권자는 이미 미국사회의 안정층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경제정책과 외교정책, 그밖의 개인적 취향과 이해관계에 따라 민주당이나 공화당 후보 중 어느 쪽을 지지한다. 소수민족 유권자도 개인적으로는 불체자에 거부감을 갖고 단속을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러므로 선거에서 불체자 편에 서는 것은 백해무익이 된다.

불체자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 가장 큰 이유는 이들이 미국재정을 축내서 납세자의 부담을 늘리고 미국사회의 삶의 질을 떨어뜨린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연구조사에 따르면 불체자 보다도 시민권자들이 재정에 부담을 주는 비율이 훨씬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불체자의 노
동력은 미국전체의 5%를 차지하는데 주로 농수산, 건설업, 서비스업 분야 하급직의 이른바 3D 업종에 값싼 임금으로 종사하고 있다. 이로 인해 미국인의 생활비가 낮아짐으로써 삶의 질을 오히려 높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일반 조직에서 상층 구조 보다는 하층 구조에서 많은 사람들이 활동해야 하는 것처럼 사회조직에도 하층 노동인구가 충분히 공급되어야 한다. 고대에는 피정복민, 중세에는 봉건제도, 제국주의 시대에는 식민지가 이런 노동력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현대 민주주의 시대에는 노동력의 자
유왕래에 의한 수요공급으로 이 균형이 유지될 수밖에 없다.지금 미국의 문제는 불체자가 아니라 저렴한 노동력의 부족이다. 세계의 다른 지역에 비해 물가가 비싼데 저임금 노동력이 없으므로 생활용품이 모두 외국에서 수입된다. 따라서 무역적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여 경제력을 약화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산업의 외국 의존도가 심각해 국력을 약화시키고 심지어는 국방에 필요한 모병에도 곤란을 겪고 있다.

그러므로 미국이 계속 성장 번영하기 위해서는 불체자의 입국을 막을 것이 아니라 불체자를 선별 허용하는 이민정책의 일대 전환이 필요하다. 젊고 건강하고 범죄기록이 없는 불체자는 일을 하고 세금을 내도록 허용하고 일정한 기간 국가와 사회에 기여한 불체자에게는 영주권을 주고 나아가서 시민권을 부여해야 한다. 말하자면 일반단체의 회원 제도처럼 시민권자는 정회원, 영주권자는 준회원, 필요한 불체자는 예비회원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불체자 사면운동은 지금처럼 이민자단체의 운동에서 탈피해야 한다. 주류사회의 상공업계를 중심으로 이민자와 불체자의 유용성을 제기하여 정치적 이슈로 발전시켜야 한다. 이렇게 되면 불체자 문제는 반드시 미국 대선의 핫이슈가 될 것이며 불체자 편에 서는 대선후보가 필승을 거두는 날이 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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