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국의 연속극

2008-02-12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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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륭웅(공학박사)

요즘 우리 TV에는 연간으로 치면 수 백편의 드라마-연속극들이 나온다. 나는 이를 거의 보지 않으니까 무어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극을 제외하고는 얘기들이 대부분 대동소이할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네 살림살이에서 뭐 새로운 얘기가 나올 것이 있겠는가.우선 사극의 경우, 역사 왜곡이 지나치고 어떤 특정부분만 강조하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이런 저런 이유로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사극은 ‘역사공부’라는 의미가 있고, 그래서 정사(正史)를 말해줄 책임이 있다. 정사가 모호한 경우 주위의 관련서적을 참조, 가능한 합당한 결론을 내리고 또 그런 것을 얘기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너무 쉽게, 편할대로 역사를 해석하지 않았나 반성해야 한다. 그리고 여자들의 얘기가 너무 많이 나온다. 그것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고 그래야 할 것인데 그것이 주제가 되고 또 그런 것이 주제가 되었던 역사의 한 부분이 있었다고 해도 침소봉대하는 느낌이다.일반 드라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경우 ‘사랑’얘기가 주제이다. A는 B를, B는 C
를, C는 A를 좋아한다는 얘기인데 이 설정을 위해서 너무 많은 작위적인 사건, 우연을 만든다.


보는 사람들은 이미 왜 얘기가 저리로 가는지 알고 있다. 그리고 그 결론도 안다. 한 두번 보면 그 답이 나오므로 더이상 볼 필요도 없다.
인기 있는 드라마의 경우는 횟수를 늘리기 위해 얘기를 조작한다고 한다. 일종의 사기 행위이다. 나는 그런 사기의 일부분이 될 생각은 없다. 작가가 얘기를 만들 때는 일정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함이다. 우매한 민중을 깨우치기 위한 것일 수도, 가르칠 목적으로 쓰는 것이다. 그런 의도를 팽개치고 단순히 얘기를 늘리기 위한 목적으로 곁 길로 가는 것은 죽도 밥도 안되게 만들어 보는 사람이 무엇을 보았는지, 왜 저런 것을 만들었는지 헷갈리게 만든다.

드라마의 얘기 중에는 유부남이 처자를, 유부남이 유부녀를, 뭐 그런 것이 주제로 나온다. 배우자를 사랑하지만 딴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다. 똑 같이 사랑할 수도, 한쪽을 더 사랑할 수도 있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대부분이 ‘원위치’로 돌아가는 결론을 내린다. 그럴 바에야 왜 처음부터 사랑을 했을까? 원위치로 가면 거의 절대 다수가 여자가 피해자로 남는다. 책임도 못 질 것이면서도 사랑을 시작했다는 것은 기만이요, 사기이다.

나는 오래 전에 일본의 미니 시리즈를 본 적이 있는데 ‘장미’라는 글이 제목 속에 포함되었었다. 유부남이 다른 여성을 사랑하게 되어 아내에게 말하고 이혼 후 그 여자에게로 가는 얘기였는데 ‘역시 한국의 얘기꾼들과는 많이 틀리구나’하고 느꼈다.한국의 모 인기 작가는 너무나 말이 많아서 어쩌다 TV에서 그 사람이 쓴 것이 나오면 즉시 꺼버린다. 너무 피곤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드라마에 외국인이 많이 나온다. 나는 그 때마다 왜 돈 없는 나라에서 외국인을 쓰나 하고 생각한다. 무슨 회장이며 사장이며 재벌이며 하는 똑같은 구도에서 현실과 동떨어진 얘기로 가뜩이나 심난한 우리를 더 괴롭게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나는 그간 유명했던 드라마를 한 편도 본 적이 없다. 척 보면 곧바로 결론을 알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보았던 ‘서울 뚝배기’가 유일하게 끝까지 본 연속극이다. 얘기가 단순하고, 서민적이고, 소탈한 사람들의 얘기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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