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가설무대

2007-12-29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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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태(시인)

대단위 유랑극단은 다 사라지고 작은 규모의 유랑극단 몇이 한국의 유랑극단 면모를 유지하면서 벽촌을 찾아다니며 공연을 하고 있다. 관람객이라야 몇몇 되지도 않는 초라한 공연, 그 공연을 위해 먼 길, 굽은 길, 언덕길, 산길을 넘고 강 길을 건너 벽촌을 찾아가서 바람 거센 벌판에다 천막을 치고 거기에다 가설무대를 설치한다. 그래서인지 유랑극단에서 보여주는 심각한 연극의 내용도 눈물이 나지만 웃음거리의 희극도 웃으면서 눈물이 난다.

유랑극단에서 이름을 날려 서울 서대문 네거리에 있던 동양극장 무대에 섰던 임춘앵 여사나 배벵이굿으로 이름을 떨친 장소팔씨도 유랑극단의 희극배우였으나 희극을 하면서도 관객의 가슴에서 슬픔을 끄집어내는데 명배우였다.관객들의 눈에서 눈물을 진탕 빼면 그 유랑극단의 공연은 성공이다. 유랑극단의 공연을 보려고 집을 나서는 시골부인들은 손수건 두 세장을 필수적으로 챙겨 간다. 답답하고 서러운 속내를 풀어내는 명약은 쏟아내는 눈물이다. 우리 어머니도 그랬다.


가난한 살림에 먹성 좋은 아이들은 우글거리고 돈 들어가야 할 곳은 많은데 아버지의 공무원 월급이라야 한달 먹을 쌀값도 되지 않으니 울고 싶었을 때가 많았을 것이다. 가끔 내 어머니는 젖은 손수건 두어 장을 방한용 새끼줄에 둘둘 묶여있는 마당 한복판 수도가에서 맹물에 헹구고 있었다. 울고 싶은 답답한 심정을 풀어내느라고 유랑극단이 오는 날, 입장료가 아주 싼 유랑극단 공연에서 실컷 울고 오시었다. 집안에서는 짜증이나 상한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웃는 모습만 보이시던 어머니가 그 날은 속이 시원하다, 시원하다 하시었다. 나이 들어 생각을 해 보니 유랑극단의 가설무대처럼 어머니도 인생 가설무대에서 눈물나는 희극을 연출하면서 삶을 꾸리신 것이다.

가설무대란 뜯기 쉽게 설치한다. 다음 정거장이나 기항지로 또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인생도 하루, 한달, 그리고 몇개 되지도 않는 일년씩을 쉽고 가볍게 설치하면서 살면 떠날 때 쉽다. 돈이 많으면 돈이 아까워 등이 무겁고, 명예로 이름을 빛나게 하면 명예가 아까워 목이 뻣뻣하다.
쉽게 설치하고 쉽게 뜯어 자리를 옮기는 유랑극단처럼 사람들은 잠에서 깨어난 아침이면 어디를 간다. 돈 벌러, 우체국으로, 결혼식장으로, 장의사로, 돌집으로, 시장으로, 식당으로, 주막으로, 백화점으로, 놀음판으로 발걸음 옮기는 일이 따지고 보면 하루의 일과고 어디를 가든지 가다가 끝내는 것이 삶이 아니던가? 그걸 우리는 삶의 변화이고 인생이라고 정의를 한다.
어떤 변화가 우리에게 왔을까? 시간도 그걸 닮았는지 사람들을 데리고 일년 단위로 자리를 옮
기면서 사람의 얼굴을 올해 다르고 내년에도 다르게 변화를 시킨다. 늙어가며 변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눈물나는 희극이다. 나이 들면서 획을 파는 얼굴의 주름들, 안동 근처 하회마을 탈바가
지처럼 희극적이고 그 희극적인 얼굴에는 눈물이 감추어져 있다. 그러니 인생을 엮는다는 것이
뜯기 쉬운 가설무대를 설치하고, 내 눈앞에 임시로 들렸다 가는 사람들을 관객 삼아 신나게 보
여주는 서글픈 멜로 드라마가 아니겠는가!
유랑극단 무대에는 막이 없다. 툭 터진 무대에 순서대로 나왔다가 들어가면 된다. 그래서 더 서
글프다. 한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게도 막이 없다. 그냥 왔다가 가면 된다. 갈 때에는 이것 저것
다 뜯어간다.

노고를 끌고 다니던 경제관념도, 인생철학도, 미움도, 사랑도, 잠시 기억하던 친구나 이웃의 얼굴도 모두 뜯어간다. 흔적이 없다. 그걸 아는 어머니들은 자식을 보되 내일이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안타까움으로 정성스레 보았고, 내일이면 내 눈이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자식들을 쓰다듬었고 내일이면 어디로 또 가야 할런지도 모른다는 서운함으로
삼시 세 때 정성으로 음식을 만들었다. 내 어머니도 그랬다. 그런데도 우리는 다 잊고 산다. 없어지지도 않고 삭혀지지도 않는 어머니의 고난처럼 무수한 고통으로 솟아오른 산 앞에서, 산을 보며 산자락 아무데서나 소리를 냅다 지르면 보잘 것 없는 그 소리에도 산은 고통의 흔적을 메아리를 만들어 되돌려 보내주는데 나에게는 여운으로 번지는 아무런 메아리가 없다. 무엇이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을까?

나에게도 유랑극단의 한 공연이 끝나면 어디서인가 또 해야 할 공연의 순서가 기다린다. 아! 이번에는 그곳이 천국이라 하였던가? 아련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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