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흥남부두 철수작전 비화

2007-12-22 (토)
크게 작게
조셉 리 (아틀란타)

올해는 흥남부두 철수작전 57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 날을 되새기며 한국전쟁 역사를 제대로 모르는 젊은 세대들에게 긴박했던 당시의 전쟁 비화를 알리고 싶다.6.25 전쟁이 일어난 해, 필자는 18세 청년으로서 당시 북한의 고급중학교 학생이었는데 전쟁이 일어나기 전후 두번에 걸쳐 인민군에 입대하라는 통지를 받았으나 두번째는 의무적으로 입대하게 되어 있어서 도피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 10월 중순 유엔군이 진격해 올 때까지 무더운 여름동안 산으로 들로 도피생활을 하면서 고난의 한때를 보냈다.

필자의 고향은 함흥평야 동남쪽 10마일 정도 되는 농촌마을이었으며 뒤에는 산토끼, 꿩들이 서식하는 소나무 야산이었고 앞에는 과수원과 밭이 있는 그야말로 산수가 수려한 곳이었다.9.28 인천에 상륙한 유엔군은 서울을 수복하고 계속해서 38선을 돌파하여 서부전선은 워커 장군이 지휘하는 8군 예하 부대가 중공군의 한국참전 정보를 전혀 모른채 평안남북도 접경지역인 청천강변의 운산, 희천 등지까지 진격했으나 11월 초순부터 압록강을 넘어 한국전에 개입한 중공군 18만명의 인해전술 기습공격으로 인하여 미군의 정예부대인 제 1기갑사단, 제 2 보병사단 등이 많은 사상자를 내고 허무하게 무너지면서 무질서한 후퇴를 하게 되었는데 이 전투가 6.25
전쟁사에 기록되어 있는 불행한 1.4후퇴라고 한다.


한편 동부전선은 알몬드 장군이 지휘하는 미 10군단 예하부대 해병 1사단과 육군 7사단 병력이 중공군의 유인 기반 전술에 말려들어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속에 험준한 산악지대 장진호까지 진격했으나 중공군 6개 사단의 2중3중 포위 기습공격으로 거의 절망상태까지 이르렀으나 해병 1사단장 스미스 장군의 탁월한 전술 지휘와 해병 1사단 장병들의 필사적인 용감한 전투로 황량한 주검의 장진호를 1950년 12월 12일까지 탈출하여 흥남부두까지 집결, 철수작전에 합류하는데 성공하였다고 한다.
10월 중순 유엔군이 함흥까지 진격해 들어옴에 따라 지긋지긋하던 도피생활도 끝내고 자유민주주의 통일이 곧 되는줄 알았는데 중공군의 기습공격으로 유엔군이 다시 철수한다는 불길한 소문이 들리면서 다시 피난길에 나설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서 사랑하는 가족들과 헤어지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는데 그 날이 가족들과 헤어지는 마지막 날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채 57년이라는 긴 세월을 이산가족의 한을 품고 살아왔다.

중공군이 필자가 살던 마을을 점령하는데 10마일이나 되는 흥남부두까지 영하의 혹한 속 눈길을 걸어서 간다는 것은 무척 어려웠지만 그 때마침 후퇴하는 미군의 짚차를 만나 흥남 외곽 다리 검문소까지 도착했으나 초소의 미군 헌병이 통과를 불허하여 하차할 수 밖에 없었다.당시 그곳에는 다리를 건너기 위해 초조하게 기다리는 피난민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는데 피난민 가운데 인민군이 숨어있다는 이유 때문에 다리 통과가 거부되었으나 그 다음날 새벽 통행금지가 해제되는 6시를 기하여 피난만들은 필사적으로 얼음 위를 뛰어 흥남 시내로 진입할 수 있었고 그 날 저녁 그 다리는 지축을 뒤흔드는 폭음소리와 함께 폭파되었다.

이튿날 부두에 도착해 보니 철수하는 미군과 피난민 그리고 군수물자들로 인하여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으며 필자도 미군의 지시로 드럼통 몇개를 굴려서 날른 다음 그 유명한 기적의 메리디스 빅토리호를 타고 2박3일만에 붉은 동백꽃이 피어있는 낯설은 거제도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이 배에는 1만4,000명의 피난민이 타고 있었다)그 배 선장의 이름은 레너드라루라로 뉴저지의 한 수도원에서 수사로 지내다가 2001년 10월 14일 87세를 일기로 선종하였다고 한다. 진심으로 명복을 비는 바이다.

필자도 이제 소설과 같은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내고 여생을 아틀란타의 숲속 마을에서 편안하게 지내고 있어 하나님께 감사한다. 바라건대 한반도에 자유민주주의 평화 통일이 조속히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