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가장 젊은 날

2007-12-20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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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휘(언론인)

몇 해 전에 일본 서점가를 강타한 책이 있었다. 61세의 에이로 구스게가 쓴 노인문제를 다룬 수필집 <대왕생(大往生)>이다.

노인에 관한 책은 많다. 노인학 전문서적을 비롯해서 에세이니 수필이니 하는 장르의 책들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어째 이 책이 유독 유명해졌는가. 다음에 요약하는 몇 가지 내용을 들여다 보면 그 이유를 알만 하다.“우리가 한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가장 젊은 때는 오늘 지금이다. 내일보다는 오늘이 젊으니까. 지난 세월은 이미 과거지사, 그것은 내가 앞으로 살아갈 시간이 아니므로 나에게 허용된 시간이 아니다. 고령화란 장기간 죽음을 기다려야 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가 중요한 화두로 등장한다.”저자는 고령화 사회로 들어간 21세기 인간들에게 옛날과 다른 입장에서 죽음과 맞닥뜨려야 하는 상황 설정으로부터 출발한다.


“머리가 희어졌다고 탄식할 게 아니라 대머리 될 때까지 오랫동안 잘 살아왔다고 생각하라. 일본에서 인기 있는 씨름, 스모의 세계를 보아라. 스모 선수는 30대면 할아버지 취급을 받는다. 젊다고 생각하면 젊고, 늙었다고 생각하면 늙은 것이다”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무엘 울 멘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유심연기(唯心緣起)를 논하고 고승의 설법을 인용하지 않아도, 저자가 스스로 살아온 생의 진국을
짜낸 농축된 인생관이 배어있음을 알 수 있다. 세상만사가 마음 먹기에 따라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가를 쉽게 터득하게 해 준다. 세월이라는 것도 마음 따라 흐르는 강물이라는 것을…그

는 또 이렇게 덧붙인다.“건강한 90세 할머니에게 의사는 우유를 먹으라고 강요한다. 하지만 먹기 싫은 것을 이제 와서 억지로 먹느니 차라리 안 먹는게 자연스럽다. 잠 잘 자고 있는데 수면제 먹으라고 깨우는 것과 같다. 남편은 정년 후를 생각하지만 나는 미망인이 된 다음을 생각한다”
얼마나 현실적이고 솔직한 인간적인 처방인가. 자연의 섭리에 억지 부리지 않고 순응하며 세월의 자국을 애달파하지 않고 순리대로 살겠다는 이 쉬운 이치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동조하는 것이다.

절망과 희망, 부정과 긍정, 이것은 사람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무형 무취의 추상 개념이다. 잡히지 않고 보이지 않으나 그 위력은 막강하고 미치는 영향은 방대하다. 문명인이라는 사람들은 건강관리를 위해 새벽부터 헬스클럽을 찾고 휴일에도 쉬지 않고 산에 오른다. 그러나 진짜 필요한 감정 관리에는 소홀하다. 감정은 무서운 힘으로 우리의 실존을 지배함에도 불구하고.감정 발산을 못하는 꽁생원은 암에 걸릴 확률이 높고, 백혈병이나 임파선 암은 성격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게 의학계의 설명이다. 노심초사, 슬픔, 좌절감, 공포, 피해망상, 질투, 응어리진 마음, 복수심, 화냄… 이런 것이 현대병의 원흉이라 함은 새삼스런 이론이 아니다.

굳이 남편이 죽은 다음의 자기 인생을 생각하는 60 노파 작가의 생각에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누구나 과욕과 무명(無明) 같은 저급한 감정으로부터 일탈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하여 희망과 기쁨, 감사와 사랑, 신념과 용기를 가지고 본래의 자기대로 살아갈 일이다.이렇게 해서 조달되는 행복은 나 한 사람만의 몫이 아닌 인류가 소망해 온 모든 사람의 최대선(最大善)이 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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