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동북아 균형자론의 허실

2005-04-21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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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주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하여 임진왜란을 일으킨 구실은 ‘정명가도’ 즉 명나라를 치러 가는데 길을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그가 정말로 명나라를 칠려고 했던지는 알 수 없으나 후일 일본의 행적을 보면 한반도가 대륙 진출의 교두보로서 큰 역할을 했다. 일본은 20세기 들어와 한일합방으로 먼저 조선을 식민지화 한 후 만주와 중국 대륙으로 침략의 마수를 뻗쳤던 것이다.

한반도는 이처럼 일본이 대륙으로 진출하는 길목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중국이 일본을 정벌하는 길목의 구실도 했다. 아시아 지역을 통일했던 몽고의 원제국이 고려를 앞세워 일본 정벌을 시도했던 것이 그 예이다. 원나라는 고려를 일본 정벌을 위한 군사기지로 삼아 전쟁 준비를 했고 고려군을 앞세워 두 차례나 일본을 침공했다가 실패한 역사가 있다.


이처럼 대륙국가가 강해지면 해양으로 나아가려고 했고 해양국가가 강해지면 대륙으로 뻗어 나가려고 했다. 이런 모습은 동북아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영불간의 백년전쟁은 해양국가인 영국이 프랑스를 침공하여 대륙으로 뻗어 나가려고 했던 것이며 유럽대륙을 석권했던 나폴레옹과 히틀러는 영국을 목표로 삼아 최후의 결전을 시도하다가 실패했던 것이다.

이처럼 대륙 세력과 해양세력이 맞부딪히는 전쟁은 매우 거세기 때문에 그 전화는 매우 끔찍할 수 밖에 없다. 거대한 대륙풍과 해양풍의 길목에 있는 한반도는 두 세력이 팽팽히 맞설 때는 전화를 입었고 어느 한쪽의 세력이 결정적으로 우세할 때는 그 영향권의 지배를 받았다. 한반도가 수천년간 중국의 영향권 아래 있었고 일시적으로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역사를 보면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정부가 동북아 경제중심 국가론과 동북아 균형자론을 내세워 이에 대한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오래동안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영향을 받았던 한국이 중심 또는 균형자가 되겠다는 것은 한국이 그만큼 컸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듣기에 매우 기분이 좋은 말이다. 한국의 경제력이 크게 성장했고 그만큼 국제적 지위가 높아졌다는 것은 자타가 인정하고 있다.

그러면 한국이 정말 동북아 경제중심국가와 그리고 나아가서 동북아의 균형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이같은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우선 두가지 요소를 갖추고 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첫째, 동북아의 양대 세력인 중국과 일본 중 어느 나라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립적 위치를 지키는 것이고 둘째, 중국이나 일본 중 어느 나라의 힘에도 눌리지 않는 국력을 확보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대륙과 해양의 양대세력 중 어느 한쪽의 전횡을 제지함으로써 균형을 이루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동북아의 정세를 보면 중국과 일본의 대립 구도가 점점 가시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중국은 개방개혁 이후 세계의 경제대국으로 발전했고 이제 군사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앞으로 세계 초강국의 자리를 향하고 있는 중국은 우선 아시아의 맹주가 되기를 바랄 것이다. 이러한 중국의 대두에 불안을 느낀 일본은 재무장을 위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국제분쟁에 앞장서 자위대를 파견하고 최근 한국 및 중국과 외교적 분규를 빚고 있는 것은 동북아의 긴장 고조를 통해 재무장을 서두르려는 시도로 볼 수도 있다.

일본이 재무장을 하게 되면 그 전력은 가공할만한 규모가 될 수 있다. 병력은 적어도 전력 면에서는 중국의 맞수가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더우기 독도 문제와 교과서 문제등을 둘러싸고 한국은 중국과 한편에 서 있으며 북핵문제에 있어서도 한중간의 공동 보조가 이루어질 수가 있다. 말하자면 한국은 동북아의 세력판도에서 반일 친중의 노선으로 방향을 잡아갈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이다.

중국은 이미 북한에 대해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데 한국이 친중노선으로 기울어진다면 남북한은 중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는 사태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동북아 균형자론은 공염불에 그치는 정치 슬로건이 될 공산이 크다.

그러나 이런 전망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균형자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한 가지 길이 있다. 미국의 이해관계가 한반도에 계속 남게 된다면 중국이나 일본이 감히 길을 빌려달라고 하지는 못할 것이며 한국을 자기네 편에 예속시키려고 시도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한국의 지도층이 미국을 마치 버러지처럼 멀리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은 잘못이다.‘친미’는 그저 친미가 아니다. ‘용미’를 하기 위해서 미국과 친해야 한다는 것을 왜 부인하려고만 하는가. 참으로 한심하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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