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생명의 봄

2005-04-20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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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편집국 부국장)

공원 옆에 산다는 것이 1년 전 이사를 왔을 때는 잘 몰랐는데 살면서 점점 흥미로운 일이 많아져 가고 있다.우리 옆집에는 80세 넘은 백인 할머니가 혼자 살고 있는데 고양이 네 마리를 지붕있는 현관앞에서 키우고 있다. 그런데 우리집 차고로 가는 드라이브 웨이가 그 옆을 지나간다.머리가 허연 할머니가 허리를 굽혀 고양이 먹이를 주면 고양이는 할머니 다리에 착 달라붙어서 애교를 떨고 할머니는 허리를 더욱 굽혀 고양이 목과 등을 천천히 다정스레 어루만져준다.

그런데 춥고 긴 겨울이 계속 되면서 공원에 둥지를 둔 너구리(raccoon) 한 쌍이 푹푹 쌓인 눈 속에 먹이를 못찾아 헤매면서 심심찮게 나타나 옆집 고양이 밥을 낼름 먹어버리는 것이다.퇴근 후 컴컴한 어둠 속을 달리던 차가 속도를 줄이며 드라이브 웨이로 접어들면 고양이 밥을 훔쳐먹다 자동차 소리에 놀란 너구리가 후닥닥 도망을 간다. 헤드라이트 불빛에 긴 황갈색 줄무늬 너구리가 살이 통통하게 찐 궁둥이를 요란스레 흔들거리며 털렁대는 긴 꽁지가 빠져라 달려서 어두운 뒤뜰로 도망가는 모습이 훤하게 보인다.


처음에는 너무 놀라서 잘못 물리면 광견병 위험도 있다 싶어 차에서 금방 못내리고 너구리가 사라진 후에 차에서 나왔지만 지금은 혼쭐나서 도망가는 그 모습이 재미있다.어느 때는 두 마리가 한꺼번에 쌍으로 나타나 고양이집을 차지하는데 집에서 쫓겨난 고양이들은 너구리가 제 밥을 먹는 동안 꼭꼭 숨어서 기척도 없는데 때로는 우리집 뜰에 너구리 몰래 피신와 있기도 한다.

올해에는 봄이 왔으되 봄이 아닌 것이 여전히 날씨가 쌀쌀하니 지난 4월 초 마주친 배고픈 너구리 한 마리는 생명을 지닌 자의 아픔을 떠올리게 했다. 그날은 차가 드라이브 웨이로 다 들어섰는데도 도망도 안가고 밥을 먹는 것이었다.눈 주위에 둥그렇게 다크 서클이 진 너구리는 차안에 앉은 나와 불과 2미터 정도 거리에서 눈이 마주쳤는데 계속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허겁지겁 고양이 밥을 먹는 것이 며칠동안 굶은 모양이었다. 클락션을 눌러도 잠시 움찔할 뿐 계속 밥에서 입을 못 떼니 ‘먹는 데는 개도 안 건
드린다’는데 너구리도 건드릴 수 없어 별 수 없이 사람인 내가 차에서 내려 얼른 피해야 했다. 고양이는 그 밥을 못먹어도 굶어죽지는 않는다. 할머니가 밥 때가 되면 다시 밥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완연한 봄은 새롭고 싱그런 생명들의 합창을 들려주고 있다.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연초록 움이 터오더니 연분홍꽃을 피어올린 홍매화, 간밤의 비 한낮의 밝은 햇살을 받고 새파란 줄기가 쑥쑥 올라오더니 금새 피어난 노랗고 새하얀 수선화 무리, 단아한 모양새에 향기가 좋은 보랏빛 히아신스 등 식물들이 하룻밤 잠만 자고나면 꽃망울을 탁 탁 터뜨리니 커튼을 젖히고 창밖을 내다보는 재미가 상당하다. 이 봄이 너무 반가운 것이 너구리 한 쌍이 더 이상 먹을 것을 찾아 헤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성한 산림, 깊은 덤불 속에서는 먹을 것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날이 따뜻하면 가진 것이 없고 배가 고파도 추운 날보다 덜 처량하고 덜 외롭다.

한인사회 경기에도 따스한 봄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지난 겨울 한인 자영업소 경제사정은 날씨 이상으로 길고도 냉냉하여 이민생활을 더욱 아프고 외롭게 했다.먹고 산다는 문제만큼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것은 없다. 아무리 큰 설움이 있다 해도 배고픈 설움이 제일이라고 한다. 그래서 사는 것이 징글징글 하다고도 한다.물론 부모의 유산이 많다거나 자수성가한 후 일찌감치 은퇴하여 인생의 즐거움만 쫓아다니며 사는 사람도 많겠지만 그래도 인생의 본질은 무엇인지? 먹고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사람들이 더욱 많을 것이다.비록 고단하게 살아가는 한인들도 이제 너구리가 먹이 걱정을 하지 않는 계절을 만난 것처럼 보다 나은 삶을 가꿀 세월을 맞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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