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다시 꿈을 꾸자

2004-12-30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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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편집국 부국장)

25일 종일 집에 있다가 저녁 무렵 플러싱으로 나가보았다. 외국인 가게는 크리스마스라고 문 닫은 곳이 대부분이나 한인상가는 거의 모두가 영업 중이었다.마침 며칠째 로션병을 거꾸로 세워 쓰던 중이라 화장품을 사러 가게로 들어가 물어보았다. “크리스마스에도 장사를 하시나요?”,“물론이죠.”한인상가는 장기적인 불황을 만회하려고, 혹은 대목 장사를 놓치지 않으려고 휴일도 없이 일하고 있어 참으로‘먹고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늦은 시간 거실 커튼을 젖히고 내다보니 가로등 불빛에 반짝이며 내리는 것이 빗발인가 했다. 잠시 후 다시 내다보니 어느새 새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앨리폰드 팍은 여름내내 무성한 나무만 보이더니 지금은 앙상한 겨울 나뭇가지 사이로 먼 동네의 불빛을 보여주어 ‘저 곳에 사람이 살고있구나’를 느끼게 한다.


팍 옆에 살게 되면서 지난 봄 여름 내내 머리 꼭대기에 빨간 상투를 쓴 작은 새가 뒤뜰 장독대에 날아오는 기쁨도 맛보았지만 가끔 주차장이나 도로에서 죽은 새를 발견하는 섬칫함도 있었다. 요즘처럼 추운 날이면 얼어붙은 숲속에서 작은 새, 토끼, 다람쥐 등 동물들은 무얼 먹고살까 싶다.

캘리포니아 주립대 생물학과 교수였다가 홀연 메인 주 숲 속에 통나무집을 짓고 들어가 사는 베른트 하인리히가 쓴 <동물들의 겨울나기>를 재밌게 읽은 적이 있다.‘눈은 수많은 새들에게 밤을 보낼 보금자리를 마련한다. 눈을 파고 들어가 이글루 비슷한 눈속의 굴을 만든다. 겨울 북부의 동물들은 눈에 잘 적응하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눈덧신토끼다.

눈덧신토끼의 발자국은 몸집에 비해 턱없이 크다. 이렇게 발의 하중을 넓게 분산시킴으로써 아무리 바슬대는 눈이라도 그 위를 무리없이 걷고 뛰고 달릴 수 있다. 그러므로 눈이 많을수록 작은 나무나 관목의 잔가지를 쉽게 뜯어먹을 수 있어 눈덧신토끼에게 이익인 셈이다.’작은 미물의 강인한 생명력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점은 이 눈덧신토끼의 위장술이다.‘겨울이 오면 그동안의 갈색털을 벗고 순백의 겨울옷으로 바꿔입는다’는 것. 새하얀 눈위에 서있는 새하얀 토끼는 사냥꾼이나 큰짐승 눈에 좀체 띄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미물들은 제나름대로 보호색을 갖고 생존하는 법을 스스로 알고있는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들은 보호색도 없고 겨울잠도 자지 않으니 어찌 이 춥고 긴 겨울을 보낼까? 또 사람들은 먹고사는 것 말고 의미나 보람이란 것도 필요한 법이다.

한 해의 마무리를 잘하고 싶지만 딱히 지금 해야 할 일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냥 지나온 일들을 떠올려보니 과거, 먼 먼 옛날 나와 인연이 닿았던 친구들은 지금 어디 서 있을까? 어디쯤 가고 있을까 싶다. 젊은 날의 나는 지금 어디 있는 걸까? 가진 것은 없어도 앞날에 대한 희망으로 가슴이 터질 듯 긴장되고 그 팽팽한 긴장감이 말할 수 없이 좋았었는데. 발걸음도 가벼웠지. 싱싱한 두 다리로 어디든 날아갈 듯 했어. 그때 내 표정은 깃털처럼 가볍고 어떤 바윗덩이 같은 난관이라도 뚫고 나갈 것처럼 당당하고 야무져 보였을거야.

지금 나는 그때보다 가진 것은 많을 지 몰라도 많이 약해져 있고 겁먹었고 세파에도 시달렸다. 젊은 날의 용기와 꿈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다. 누군가 따스한 말 한 마디, 걱정스런 말 한마디 건네면 눈물이 날 것 같다고 하면 너도나도 자기도 그렇다고 할 것이다.비즈니스는 안되니 기분은 침체되고 무언가를 하겠다는 의욕도 없고 그저 무기력한 상태로 하루하루 보내고 있을 뿐 새로운 희망을 가질 생각도 못하고 있다.

하지만 새해에는 우리 모두 다시 꿈을 꾸자. 새로운 꿈을 가지자. 설사 그 꿈을 못이룬다 해도 그 순간만은 살고 있는 보람이 되지 않는가.
며칠 남지 않은 2004년을 보내면서 다시 꿈을 꾸기 위해서, 힘든 세상 살아갈 힘을 얻기 위해서 지금 내가 가장 바라는 일이 무엇인지, 가장 잘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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