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발(足)이 편해야 마음도 편하다

2004-12-28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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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옥(MOMA 근무)

우리 아파트 창문에서 내려다 보면 조그만 다리가 하나 놓여있는데 그 다리를 지탱해 주는 철사줄에는 거의 매일 비둘기들이 나란히 질서 있게 앉아 있다. 비가 오면 비를 줄줄 맞으며, 바람이 불면 이리저리 근덩거리면서도 늘 떡 버티고 앉아 있다. 그 가느다란 다리를 가
지고 왜 저리 궁상을 떨까? 편편하고 아늑한 자리도 많으련만-
그런데 나는 그게 부럽다. 얼마나 발의 중심을 잘 잡으면 저렇게 끄떡없이 지탱하고 있을까?

나이가 드니까 이리저리 부딪치기도 잘 하고, 발을 헛딛어 넘어지기도 잘한다. 중심을 놓치고 만다. 그 뿐이랴, 잘 맞던 구두가 갑자기 발이 아파 발가락에 반창고를 붙이기가 일쑤다.


나는 많이 걸어다니는 편인데 걷는 도중 새끼 발가락이 아파오기 시작하면 식은땀이 나올 정도로 뇌 속까지 찡- 하는 고통이 파고 든다. 우선 속상하다.비둘기를 보며, 반창고를 뜯어내고 다시 붙이며, 오늘은 또 무슨 신발을 신어야 되나 고민을 하면서 요새는 부쩍 나의 어머니가 오랫동안 발 때문에 고생하셨던 생각을 더 자주 하게 되었다.

-정족(定足):발은 구름 위에 설 수 없다. 반드시 땅 위에 몸 아래 현실에 붙여야 한다.

-수족(手足):’수족같은 사람’이라면 얼마나 맘에 들고 모든 것을 잘 해결해 주는 능력을 가졌을까? ‘입안의 혀’나 ‘수족같은 사람’, 그 가치 판단은 분별하기 어렵다. 수족이 따로 놀아서야 무엇이 되겠는가?

-실족(失足):발을 잃었다가 아니다. 잘못해서 넘어졌을 때 실족이란 말이 튀어나온다. 하필 맨흙(?)에 발이 빠져서… 가끔 듣는 얘기다.
이토록 족,족,족…으로 된 말이 많은 것을 보면 얼마나 발의 역할이 큰가를 알 수 있다. 일어났다 앉았다 하는 생활환경에 사는 우리들에게는 더 그 발에 신경이 쓰이게 된다. 사람의 활동을 제약하기 위해 그 발에다 족쇄를 채우던 옛 형벌도 역시 발의 만족이 사람을 활기찬
자유인으로 만든다는 원리를 잘 알고 한 일일 것이다.
풍족 속에서 부족을 찾지 말고 항상 지족(知足)할 줄 알자.
비둘기들아, 왜 내가 너희들을 궁상맞다고 했던가-. 내 생각이 모자랐구나. 너희들은 충족한데 말이지.

금년 4월에 돌아가신 어머니는 발이 아주 작으셔서 딱 맞는 구두 찾는 것도 쉽지 않았고, 살 속으로 파고드는 엄지발톱, 부러진 새끼 발가락 때문에 여기 저기 바쁜 생활을 하시는데 무척 힘들어 하셨다. 발에 누구보다도 예민해지셨던 어머니가 1995년에 쓰신 책 ‘김정옥
선생의 예절교육’ 중에서 발(足)이라는 제목으로 쓰신 글을 엊그제 한 번 더 읽어 보았다.

한문에도 능통하셨던 어머니의 해석을 여기 나누어 보려 한다. 새해를 맞으며 우리 아이들에게도 들려주고 싶은 재미있는 교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족(知足):제 발을 알아야 한다. 자기 발에 무식하면 몸 전체를 지탱하기 힘들다. 오죽하면 사람이 제 분수를 모르면 부족(不足)이란 말이 생겼을까?


-부족:네 발이 어딘가 모자란다. 그러기에 네 발로 인해 너는 부족한 생활을 하게 된다. 모든 사물도 마찬가지 평행을 잃을 때는 부족이다.
-만족(滿足): 더도 말고 작게도 말고 발에 꼭 맞는 신이라야 평안하다. 그래서 만족이다.

-흡족(洽足): 듬뿍 넉넉하게 가지게 될 때 우리는 흐뭇하고 만족이다. 발 씻고 싶을 때 깨끗이 씻고 난 다음의 기분, 이것을 흡족으로 표현했나 보다.

-발족(發足): ‘천리길도 한걸음에’ 이 속담을 우리는 자주 접한다. 아무리 부담스러운 내 발도 어디를 가기 위하여 반드시 한 발씩 내딛어야 한다. 발족 안하면 어떻게 목적지에 갈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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