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중국적’은 옳은 것인가

2004-12-24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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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정(회사원)

몇 주 전, 한국의 국회 대표단들이 방미했을 때 교포들의 대표격인 인사들이 국회대표단에게 ‘이중국적’ ‘참정권’ 그리고 교민청 신설’ 등을 요구한 것을 신문지상을 통해 접할 수 있었다.

비록 국제법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닐지라도 이 지구상에서 가장 합리적인 것을 추구하는 나라에서 살고 있음을 긍지로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또 이 법이 공평히 적용되고 잘 지켜지고 있는 땅에서 살고있는 것을 하나의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적어도 ‘이중국적’이라는 단어 자체부터가 거부감을 주고 원칙과 상식에 어긋나며 정도(正道)가 아닌 것 같이 들릴 것을 염두에 두었는지, 그리고 이런 요구사항들이 과연 미국의 충성된 시민이 되겠다고 선서한 한국계 미국 시민들의 전체 혹은 대다수의 요구사항이었는지 하는 생각이 전광처럼 머리를 스쳐가는 것은 수개월 전 어느 교포단체가 전체 회원들의 의사 타진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몇몇 간부들의 생각만으로 ‘노대통령 탄핵 성토문’을 발표했다가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크게 내홍을 겪은 사건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잔뼈가 자란 모국을 떠나 타국에 이민을 와서 그 나라의 시민이 된다는 것은 흔히 딸자식이 성장해서 다른 집안으로 시집을 가서 호적이 옮겨지고 법적으로 시집 식구가 되는 것에 비유된다.

그리고 우리는 호적이나 시민권은 아이들의 장난감처럼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도 아니며 또한 가지고 싶은 만큼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어떤 전문교육기관을 통해서가 아니라 살아오면서 터득한 생활 지혜와 상식으로 알고 있다.

왜냐하면 어떤 단체나 국가의 구성원이 될 때에는 권리만 달랑 가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행해야 할 의무도 수반되기 때문이기도 하다.논리적으로, 몸이 하나뿐인 한 개인이 지구의 반대편에 서로 떨어져 있는 두 나라의 시민으로서 동시 의무 수행이 불가능한 줄 알면서 권리 수행 쪽으로만 바라보고 편법 내지 탈법일지 모르는 사안을 공기관에서 합법적인 정부의 대표들에게 공공연하게 요구하는 것은 결코 미국적인 것은 아닌 듯이 보인다.

매스컴의 발달로 세계의 구석 구석 뉴스가 실제시간으로 전달되고 공유되고 있는 지금의 시대에 논리적인 합리성이 결여되고 상대국과 법시행의 혼선을 빚어 이해가 상충되고 더 나아가서는 갈등으로까지 이어질 지 모르는 사안을 상대국과 사전 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공공연히 허락해 줄 만큼 바보스런 정부는 아마도 이 지구상에 없을 지도 모른다.

설사 한국정부가 이중국적을 허락한다 할 지라도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상대국인 미국정부에서 “그러면 추후의 법적인 혼선을 미연에 방지키 위해 한국인들은 앞으로 시민권 신청을 받지 않는다”고 방침을 공식화 하거나 고의적인 기피로 불이익을 당하면 얻는 것 보다는 잃는 것이 더 클지도 모른다.

또 몇 겹의 어려운 과정을 넘어서 한국정부와 미국정부가 동시에 허용하는 합법적인 이중국적을 받는다 해도 아직까지 숫적으로 극소수인 한국인들은 절대 다수인 미국시민들로부터 “저 코리안들은 반쪽짜리 미국시민이다.

제 나라로 언제 날아갈지 모르는 ‘박쥐’와 같은 사람들’이라고 ‘왕따’를 당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교포 대표들이 일정한 대가도 지불받지 않으면서 귀한 시간과 금전적 소비를 해가면서 교포들을 돕고 봉사하는 노력은 높이 평가되고 크게 존중되어야 마땅하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의 제언은 대표들의 순수한 노력과 봉사에 대한 질타라기 보다는 어느 교포단체가 범했던 우(愚)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번의 사안들은 당사자들인 한국계 미국시민들의 폭넓은 의견 수렴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동기와 의도의 전부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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