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세모(歲暮)의 감회

2004-12-21 (화)
크게 작게
이성철(롱아일랜드)

12월달 마지막 한장만 남아 벽에 걸려있는 달력을 바라보면서 올해도 이제 십여일 밖에 남지 않았구나 생각하니 수수(愁愁)롭다는 생각이 든다.
지나가는 시간은 언제나 우리를 불안하고 초조하게 만든다. 그것은 무한한 상실일 수도 있으며 무한한 도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해의 마지막 날, 때묻은 달력을 거둘 때면 우리는 유난히 시간의 체온과 맥락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그 많은 날들을 얼마나 <無時間) 속에서 보냈는가? 오늘은 문득 그렇게 값없이 지나간 시간들이 똑딱똑딱 우리의 귓전을 울려주고 있는 것 같다.한 해의 하루라도 숙연히 시간의 의미와 밀도를 생각한다는 것은 그나마도 다행한 일이라 생각해 본다. 우리는 때때로 시간에 끌려가며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슬기와 창조력을 가진 사람은 시간에 이끌리기 보다는 그 시간을 이끌고 가는데 보람과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시간은 생각하기 나름으로는 하나의 감각에 불과할 수도 있다. 똑같은 분량의 시간일지라도 사람에 따라서 그 가치는 엄청 클 수도 있고, 또는 하잘 것 없이 작을 수도 있다고 본다. 시간을 부피로 느끼는 사람과 하나의 평면으로 느끼는 사람과는 실로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고 중국의 시인 도연명은 인간에게 경고한 바 있다.

하루의 새벽은 두 번 거듭되지 않는다. 오늘 아침에 결단하지 않으면 하루는 또 값없이 어슬렁 어슬렁 지나가 버리고 만다. 저녁에 그 지나가 버린 시간을 회오(悔悟) 조차 않을 것 같으면 또 다음 날의 새벽에도 새로운 시간의 그 싱싱한 생명력을 느끼지 못하게 될 것이
다.

사람들은 누구나 말한다. “시간의 귀중한 가치여!”라고. 그러나 사람들은 시간을 잘못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사리 후회하려 하지 않는 것 같다. 프랑스의 철인 장.작.루소(J.J. Rousseau)는 “시간을 악용하는 것은 차라리 아무 것도 안하는 것 이상의 커다란 낭비라는
것을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고 탄식한 바 있다.
사람들은 세모가 되어서야 허둥지둥 자기 주변을 돌아보게 된다.
세상엔 시간을 악용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 <정치적 시간> <경제적 시간> <문화적 시간>… 이런 시간들이 과연 온전하게 사용돼 왔는지, 우리는 한번쯤은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약 성서에 보면 “여러분에게 주어진 기회를 잘 살리십시오. 때가 악합니다”(엡 5:16)라고 시간 선용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우리가 다 아는대로 시간은 쉬지 않고 지나가며 일단 지나간 시간은 절대로 반복되는 법이 없다. 시간의 생명은 곧 모든 가능성의 산실이며 희망의 등불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생이라는 시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짧다는 사실을 인생을 다 살고난 후에 가서야 깨닫는다면 어리석은 인생인 것이다.

인생은 이것 저것 망설이며 시간을 낭비할 만큼 길지가 않다.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 현실이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망설이고 우왕좌왕하는 동안에 벌써 시간은 지나가 버리고 만다. 시간은 가능성을 잉태한 부단한 도전자이기도 한 것이다.

오늘, 우리는 시간의 전열(戰列)을 가다듬어 내일의 시간에 도전하며 슬기와 용기를 다해 보람찬 인생을 건설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나의 인생에 있어서 앞으로 몇 번이나 세모를 맞을 수 있을 것인가? 싫더라도 솔직하고 과감하게 한번쯤 생각해 볼만한 일인 줄 압니다. 공연히 세모가 되었다고 해서 잠시동안 감상에 젖는 것으로 또 다른 시간 낭비일랑 하지 아니함이 지혜로운 삶이라 하겠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