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세월이 뜀박질 한다

2004-12-16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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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소(포트리)

세월이 걸어가는게 아니라 달음박질을 하고 있다.

벌써 연말, 겨우 15일 남은 마지막 달력 앞에 서서 남은 날짜를 망연히 바라보고 있는데, 소리없는 외침이 쏟아져 나온다.“산소 관리 의논하러 언제 올꺼야”(한국에서) “그라지 선반은 언제 만들어?” “윤모, 김
모씨 초청은 언제” “크리스마스 선물은?” 등등, 올해 안으로 약속했던 일들이 또 해를 넘길거냐고 저마다 손을 들고 “나, 나 먼저!” 해결하라고 아우성이다.


언제나 한가하다가도 마지막 달만 되면 공연히 바쁜 것 같고 어수선해진다. 그런데 올해가 보기 드문 어려운 해였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경기가 안 좋았다는 것이다. 이민으로써야 첫째도, 둘째도 경기가 왕(王)인데, 그게 나빴다면 다른 건은 들으나 마나 줄줄이 어려웠을 것이다.

매사가 억지로는 안된다. 어렵더라도 좀 더 기다리고 참아야 할 모양이다. 아저씨 사정은 아줌마가 안다고 우리네 사정을 남이 알아줄 것도 아니고 우리들끼리 위안을 삼으면서 힘낼 수 밖에 없겠다.

올해 많이들 힘들었다. 전에는 이맘 때가 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오라 가라 하면서 밥도 사고 술도 샀었다. 올 연말은 그런 기별 하나 없이 조용하다. 어디서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생기는 것 없이 몸만 바쁘다”고, 묻지도 않는 푸념이 먼저다.

엊그제는 혼자 자장면에 배갈을 한 잔 하고 얼굴이 벌겋게 집에 들어갔더니 “누구하고 한잔 했느냐?”고 묻는다. 다들 여유 없는데 무엇하러 외식했느냐는 무언의 암시가 함축된 말임을 안다. 노래 가사처럼 남의 속도 모르면서.

그러고 보니 또 고사(故事) 한 토막이 생각난다. 옛날 제(齊)나라 사람이 부인과 한 첩을 데리고 살았더란다. 그런데 직업이 없는 남편이 외출만 하면 곤드레 만드레가 되어 집에 돌아왔다.

부인이 묻기를 “어떤 사람과 드셨나요?” “당신은 잘 모를거야. 모모 진사 양반하고” 어떤 날 또 남편이 외출했다 대취해 돌아와서는 포트리 사또 자제분이 멋지게 한턱 냈다고 묻지도 않는 자랑을 늘어놓는 것이었다. 매번 물으면 명사에 속하는 인물을 들먹이는데 하나같이 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수상히 여긴 부인이 하루는 첩에게 가만히 이르기를 “내가 한번 남편을 미행해 보려네”하고, 이튿날 남편이 외출하는 뒤를 쫓아가니 서울로 치면 망우리 공동묘지에 가 제(祭) 지내는 곳을 찾아 구걸해 먹고 부족하면 또다른 제물을 얻어먹는 것이었다.

그 아내가 돌아와 첩에게 “남편이란 우리들이 받들며 몸을 바치는 분인데 이 노릇을 어이할꼬!”라고 한탄하며 둘이서 마당에 주저앉아 엉엉 우는데 남편은 그런 줄도 모르고 밖에서 으시대면서 걸어 들어오더란다.

‘냉수 먹고 이빨 쑤신다’는 속담이 있지만 그보다 몇 갑절이나 심한 허구인 것이다. 그렇지 우리들 주위에서도 별 영양가 없는 가장의 체면이나마 매번 밖에서 자작했다고 말하기가 체면이 안 서 “응- 오늘은 상록회 회장님 하고, 응- 오늘은 평통 회장하고...” 식으로 묻지도 않는 허풍을 늘어놓을지 모른다. 경기가 없다 보니.연말, 전화인사 내지는 송년카드라도 한장 보내야 할 친지 여러분! 이 난을 빌려 송년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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