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성웅 이순신

2004-12-16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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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주필)

요즘 KBS-TV의 사극 프로그램인 ‘불멸의 이순신’에서 묘사되고 있는 이순신의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은 초라하기가 그지없다. 이순신이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을 원균과 함께 지내는데 항상 원균 보다 못나고 눌려지내는 보잘 것 없는 인물로 등장한다. 이 때문에 이 드라마는 한때 시청자들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는데 드라마 속에서처럼 이순신과 원균이 함께 성장했다면 5살 손위인 원균이 매사에서 우월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순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행적은 정확히 알 길이 없지만 그가 성장한 후 걸어온 인생역정을 보아도 그리 순탄하고 행복한 인생은 아니었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6년 전인 선조 9년 무과에 급제한 후 주로 함경도 변방에서 무관생활을 했는데 만주 오랑캐의 침입에 적은 수의 군사로 싸울 수가 없어서 싸움을 회피했다가 문책 해임을 당했다. 그 후 전라도
관찰사 이광에게 발탁되어 전라도 지역의 무관이 되었고 유성룡의 후원으로 몇 차례 진급하여 임진왜란이 나기 1년 전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나자 이순신은 옥포에서 왜군 함대를 격파하고 경상우수사 원균을 원조하여 노량에서 왜군을 처부셨다. 그리고 당포, 한산도에서 연전 연승을 거두었다.

이순신의 승전은 왜군에게 연전 연패하여 평양까지 쫓겨가고 있던 조정에 큰 용기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왜군에 시달리던 백성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다. 그는 이듬해 부산에 있던 왜군까지 소탕하여 제해권을 완전 장악하면서 3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그러나 전란이 난지 4년 후에 그의 전공을 시기한 원균의 모함으로 한양에 대역죄인으로 압송되어 죽음에 직면했다가 우의정 정탁의 구명 호소로 목숨만 건져 권 율 장군 휘하의 졸병으로 백의종군을 하였다.

이순신 대신에 3도 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정유재란에서 왜군에 참패하여 전사하자 이순신이 다시 3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그는 겨우 남은 12척의 배로 명량해전에서 왜군을 격파하여 다시 제해권을 빼앗았다. 그 후 퇴각하는 왜군을 섬멸하기 위한 최후의 결전인 노량 해전에서 54세를 일기로 전사하였으니 그의 인생은 참으로 고달픈 생애였던 것이다.

1905년 노일전쟁 때 대한해협에서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괴멸시켜 일본의 승전을 굳힌 일본연합함대 사령관인 도고 제독은 일본역사상 가장 유명한 해군 제독이다. 그런데 그가 가장 숭배하는 인물이 바로 일본 해군을 참패시켰던 이순신 장군이었다. 도고 제독은 자신이 이순신 장군의 발꿈치도 따라가지 못한다고 했다고 한다.

역사상 인물을 보면 이순신 보다 더 큰 영광을 누렸던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당대를 호령했던 제왕이 있는가 하면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었던 권문세가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사람을 기억하는 대신 이순신을 성웅으로 기리고 있다.

무엇이 그를 위대하게 만들었을까.이순신은 첫째, 정신으로 산 사람이다. 당파싸움이 극심하여 당파에 가담하지 않으면 출세가 어려웠던 당시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정정당당한 길을 걸었다. 둘째,
사명에 산 사람이다. 그 무엇에도 신경을 쓰지 않고 바다를 지키는 장군으로서 왜군을 섬멸하여 나라를 지키는 일에 모든 힘을 쏟았다. 그는 노량해전에서 목숨까지 버려 사명을 다했다. 셋째, 그는 보상을 바라지 않았다. 진급이나 명예를 위해 전공을 세우지 않았다. 3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가 백의종군을 하다가 다시 3도수군통제사가 되어도 그는 한결같은 군인이었다. 이런 그의 위대함이 승전을 이룩하게 했고 시대를 넘어 그를 성웅으로 추앙받게 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런 위대한 인물이 있는가. 정권을 잡아 대통령이 되려는 정치인은 있고 신도를 모아 교세를 과시하려는 종교인은 있지만 진정으로 숭앙을 받는 정치인, 종교인이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일가. 현실의 이익을 위해 불의와도 타협하고 작은 공로로 큰 상을 받으려 하고 제사 보다 제밥에 마음이 가있는 사람들이 결코 위대한 인물일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의 역사에서 위기였던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 장군이 나라를 구했다. 그러나 또 위기를 맞았던 19세기 말에 그런 위인을 만나지 못해 결국 망하고 말았다. 국민적 갈등으로 심한 혼란을 겪고 있는 지금이 또한 위기라면 우리는 또 다른 위대한 인물이 필요한 때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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