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잃어버린 세월

2004-12-15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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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돈(법정통역사)

연속극 <겨울연가>가 일본을 휩쓸고 있다는 한류(韓流) 소식에 다 늦게 DVD를 구해 보았다. 나는 이 연속극을 보면서 너무 많이 울어 아내로부터 놀림을 받기도 했다. 그것은 극중의 슬픈 사랑 이야기 때문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나의 ‘잃어버린 세월’의 한(恨) 때문이었다.

극에서 보는 그런 화려한 학창시절이나 슬픈 사연이나마 그런 절실한 사랑을 가져보지 못한 채로 불운했던 나의 소년시절을 생각하는 서러움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극의 내용이 아니라 나의 한심했던 소년 시절을 회한(悔恨)한 것이었다.


나는 동요가 없는 세대에 속하는 서러움이 있다. 나의 소년기는 온통 전쟁판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2차대전 말기 때였다. 총동원 전시 태세에 들어가 있을 때라 어린이들에게 가르치는 노래 조차 모두가 전쟁과 관계되는 군가가 전부였고 본래 의미의 동요라는 것이 낄 수 없었다. 그 때는 군가가 노래의 전부인 줄 알았고 이 군가들을 부르며 자랐다.

해방이 되어 우리말로 된 동요가 보급되었지만 후일 그 작가들이 공산진영에 가담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많은 노래가 금지되는 수난을 당했고 연이어 곧 6.25전쟁이 터지는 통에 또다시 군가 전성기가 되었다. 이래저래 동요란 것을 배워보지 못하고 소년기를 지났다.동요를 모르는 소년이었던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있다. 내가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4학년일 때 같은 반에 경찰서장의 아들이 있었다. 이 친구와 서장 관사에서 놀면서
그 때 한창 유행하던 ‘높이 들어라 붉은 깃발을...’ 하는 공산당의 적기가(赤旗歌)를 신나
게 부르고 있었다. 배운 동요가 드물었고 그 때 공산당의 혁명가들이 아이들에게도 휩쓸고
있을 때였다. 난데없이 친구의 아버지인 경찰서장이 아이의 뺨을 후려갈기며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나는 혼비백산 집으로 도망와서 우리 아버지로부터 적기가 같은 금지된 노래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이러다가 소년기에 배우기 시작한 노래라는 것이 유행가라는 어른들의 노래였고, 그 노래말
들이 ‘가거라 38선’이라던가 ‘홍도야 울지마라’ 같은 소년들의 정서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한참 꿈 많은 소년기에 걸맞는 동요를 기억하는 것이 없이 자랐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한을 가지고 있다.

나는 월남전쟁이 한창일 때인 60년대 말에 월남에 가 있었다. 그 때 사이공의 중심가 노점상 중에는 방송국 직원이 부업으로 방송국이 가지고 있는 음반을 녹음한 음악 테입을 만들어 파는 가게가 있었다. 이 가게에서 나는 생각지도 않던 의외의 테입 한 개를 샀다. 2차대
전 때 불렸던 일본 군가를 모은 것이었다.

이날 저녁 룸메이트인 고교 동창친구와 몇몇이서 맥주판이 벌어졌는데 거나하게 취한 다음에 이 일본 군가를 들었다. 전쟁판이라 격이 맞는 것 같았다. 어릴 적 부르던 군가들이 흘러나왔다. 모두 따라 불렀다. 이 군가들은 내 나이 예닐곱 살 즈음에 배웠던 노래들이라 일본말인 그 가사의 뜻은 잘 몰랐지만 그 때 배운 노래라고는 이런 군가 밖에 없었으므로 우리에게는 추억의 동요로 기억되는 노래인 것이다.

우리는 많은 곡을 소리내어 합창으로 불렀다. 이러다가 문득 우리는 모두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무도 왜 우는지 묻지 않았다. 서로의 가슴속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어린 시절의 동요를 부른 것이었다. 그 노래말들이 어떤 뜻이건 정치적으로 이념이 다르고 혐오하는 나라에 속하는 노래라는 등의 이유는 이 때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다만 우리는 어린 시절의 동요를 부르고 있을 따름이었다. 마치 한풀이라도 하듯이 우리는 맥
주를 마시며 노래를 부르고 또 불렀다.

다시 30여년이 지난 지금, 이제는 이 군가 조차 거의 기억에 없이 다 잊어버렸다. 소년시절을 추억하는 노래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불우한 세대의 한 조각 구멍난 세월이다. 정치적 자유를 억압당하고 억울해하는 386세대들, 그들에게는 그래도 그들의 낭만을 담은 그들의
노래가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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