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버릴 것과 남길 것

2004-12-09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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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춘석(뉴욕그리스도의교회 목사)

올해도 마지막 달이 오고야 말았다. 아무 것도 해놓은 것 없이 오직 자신의 생존만을 위하여 동분서주하며 쫓고 쫓기며 살아온 세월들이 아니었던가. 회한(悔恨)과 부끄러움이 온 몸을 휩싸듯 얼굴이 달아 오른다.

‘나는 과연 어떤 흔적을 남기고 해를 넘길 것인가?’ 사랑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두고 온전히 마음을 비우는 사람과 집착의 중독증에서 풀리지 않은 채 그저 해를 넘어가는 경우가 있다. 때의 중요성은 다시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떠날 때를 알아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부족한 개인이나 사회일수록 깨달음이 늦고 실패의 경험만 반복한다. 그래서 배울 게 있는 인생의 선배들은 ‘패기’와 ‘경륜’의 조화를 중요시한다. 그 타이밍 포착이 인생의 관건이라고 한다.
그러나 어떤 이는 물리적으로, 어떤 이는 꾀로, 어떤 이는 독점적 권위의 연장만을 위해 골몰한다. 그리고는 끝없이 욕심이 세상의 혼탁과 타인의 슬픔을 키우고 있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에 남아있는 유적지를 살펴보면 대체적으로 둘로 나뉜다. 하나는 무덤이다. 경주의 왕릉들, 이집트의 피라미드, 인도의 타지마할, 중국의 진시황능 등이며, 또 하나는 거대한 성곽과 탑이다.

도시마다 높아져가는 탑들과 남한산성, 중국의 만리장성, 로마의 콜로세움, 터키의 소피아 사원 등이다.지금은 모두 사라진 과거의 영광이지만 절대 권력을 가졌던 당시의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사람들은 사라졌지만 남아있는 건물들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무엇을 담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하나는 영원한 삶을 살고 싶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안전한 삶을 보장받고 싶다는 생각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죽음 이후에도 영원한 삶을 살고 싶은 마음으로 웅장한 무덤을 지었고, 견고한 성곽을 통해 안전을 보장받고 싶어 했다. 우리가 사는 동안 돈을 버는 것도, 명예를 얻는 것도, 지식을 얻는 것도 소중한 일이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 보다는 귀한 것이 없다.

아직도 때는 늦지 않았다. 후회만 하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아름다운 흔적을 남기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리라고 다짐해 본다. 내가 오늘 이렇게 존재할 수 있는 것도 누군가의 사랑의 손길에 힘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받은 것 만큼이라도 남에게 베풀어 줄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겠는가.

가난한 이들에게 겨울은 두려움이다. 난방비가 없어 차가운 방에서 잠을 자고 라면으로 끼니를 때운다. 두꺼운 외투 한 벌도 이들에겐 사치이다. 가난과 병으로 서글픈 사람들, 이웃을 찾아 손을 내미는 당신이 거대한 무덤과 웅장한 성곽이 없어도 귀한 것을 남기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제 마지막 달력을 보면서 희망을 남기고 부끄러움을 버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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