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우리집의 한국어 교육

2004-12-08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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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주희(롱아일랜드)

우리 집에 한국일보가 배달되는 시간은 새벽 5시반에서 6시 사이이다. 올해 열일곱살 난 11학년생 아들은 누가 시키지 않는데 6시 쯤이면 드라이브웨이로 나가서 신문을 스스로 집어다 본다.

스쿨버스가 오는 6시반까지 주로 스포츠 연예판을 본다(내 생각엔 예쁜 여자 연예인 사진을 주로 감상하는 것 같음).아들이 학교에 가고 나면 나는 비몽사몽간에 우선 본국판을 먼저 들추고(20년을 미국에 살아도 본국소식이 더 그리운지), 나머지는 초벌구이식으로 한 번 훑고 식탁 위에 놓는다.
남편은 가게로 출근하면서 아내는 잊어먹어도 꼭 한국신문은 옆구리에 끼고 간다. 가게에 와서 한가한 아침시간에 커피 한 잔 하면서 꼼꼼히 읽는다(먼저 읽고 신문 버렸다간 부부싸움 크게 난다).


기사 중에 내 마음을 적시는 부분이 있으면 차분히 오려서 A4 용지에 테입으로 스크랩 해 놓고, 용지에 여백이 남으면 ‘Mom’s Note’라고 위에 쓰고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 평소 고쳐야 할 생활태도 등을 간단히 메모식으로 쓴다. 그리고 이것을 3장 복사해서 그 날 오후 아이들(아들, 딸)이 학교에서 오면 한 장씩 나눠주고 식탁에 둘러앉아서 돌아가며 복사
한 내용을 낭독한다. 그리고 끝으로 내가 ‘Mom’s Note’를 읽고 ‘어른들의 잔소리’를 몇마디 한다.

이것이 우리 집의 한국어 교육이고 예절 교육이고, 인간 교육이다.
우리집은 한인촌에서 고속도로로 1시간30분여 떨어져 있고, 한국 TV도 안 나오고 일체의 한국문화와 두절된 롱아일랜드 동쪽 구석에서 유일하게 구해서 쓸 수 있는 한글교육 자료가 바로 한국신문인 것이다.

오늘은 11월 30일자 신문기사 중 이순원씨의 고정칼럼 중에서 ‘할아버지의 사람 평가’와 쿠바 난민 1.5세 출신 카를로스 구티에레스가 미국 상무장관에 지명된 기사를 스크랩 했다(그 기사가 유독 내 가슴을 때렸으므로...) 그리고 ‘Mom’s Note’ 난에는 평소의 내 소신의 색채 대로 ‘할아버지의 사람 평가’와 같이 사람의 외부에 나타난 것을 따지지 말고,
즉 A학점 몇 개, 일류대를 가느냐, 이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이 단정하고 따뜻하고 정직한 사람, 기본 생활 태도가 바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쓸 것이다.

또 하나는 켈로그 시리얼 회사 트럭 운전사로 시작해서 25년만에 CEO에 오르고, 6세 때 마이애미 호텔 벨보이에게 처음 영어를 배운 위대한 미국 성공 스토리인 난민 출신 구티에레스 미국 새 상무장관을 예로 들면서 우리와 같은 이민자들이 어떠한 생활 자세로 이 나라에서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자유토론 할 것이다.

이러한 내 방식 대로의 한국일보 교육 자료를 써서 공부(?)한 지가 2000년 초에 시작했으니 거의 5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그동안 신문 복사 한국어 공부 자료도 작은 산더미 만큼 쌓였고, 무엇보다도 이제 고등학교
에 재학 중의 세 아이들이 한국신문을 쉽게 읽고 한국문화에 친숙하고 한국 예절에 바른 점 등 무형의 자산이 쌓인 점이 더 뿌듯하다.

몇년 전 플러싱 한국식당에서 옆 자리에 앉은 일가족의 식사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엄마, 아버지, 이모, 아들(고등학생), 딸 둘(20대 초반)으로 이루어진 가족인데 딸 둘이 어찌
나 똑바르게 영어로 따지듯이 이야기를 잘 하는지, 나는 그들이 변호사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른들은 피의자 모양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간단히 맞장구 치는 수준이었다. 아
이들은 영어로 할 말 다 하는데 어른들은 영어를 제대로 못하니 그 대화가 아이들은 말하고 어른은 듣기 위주였다.

나는 그 기울어진 대화 모습을 보면서 우리집은 식탁 언어는 꼭 한국말을 써야겠다고 다짐을 했었다. 더 이상 식탁에서 한국말이 사라질 때 부모는 외롭고 초라해지는 것이다.

나는 내가 늙어도, 아니 아주 많이 늙어서 양로원에 가서도 내 식탁머리에 앉아 꼭 한국말을 쓸 것이다. 그것이 힘들게 살아가는 이민 1세의 마지막 자존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한국신문을 이 잡듯 샅샅히 읽고, 스크랩 하고, 아이들을 불러 식탁에서 한국어
공부를 한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제 2 외국어로 스패니시를 배우니 영어, 한국어, 스패니시 3개 국어를 할 수 있는 3중언어 가능자로 성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아들녀석에게 궁금한 점이 하나 있다. 왜 같이 배달되어 오는 뉴스데이는 안 집어오는지 하는 점이다. 비가 오는 날도 뉴스데이는 내버려 두고 꼭 한국일보만 집어올까?이 질문은 아주 아꼈다가 아들이 더 크고 어른이 되면 꼭 한 번 물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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