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주와 조상, 그리고 이웃에게 드리는 마음의 11월은 하늘이 유난히도 깊다. 서늘한 바람속에 묵은 잎이 떨어지고, 들녘은 한 해의 결실을 마무리한 채 고요한 숨을 고른다. 대지는 겨울의 품으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 햇살을 품고 있다. 서양에서는 이 계절을 감사의 달이라 부른다. 한 해의 수고와 열매를 거두며, 창조주께 감사의 제단을 올리는 달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는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로 그 기원은 17세기, 신앙의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넌 청교도들의 눈물과 기도로 거슬러 올라간다.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도착한 이들은 척박한 땅에서 혹독한 겨울을 맞았다. 절반 가까운 이들이 질병과 추위로 쓰러졌고, 남은 자들은 매일 새벽마다 무릎을 꿇었다.
그들의 기도는 단순했다. “하나님, 우리가 아직 살아 있음을 감사합니다.” 그 해 가을, 비로소 작은 수확이 있었다. 그들은 울면서 웃었다. 곡식 몇 자루와 옥수수, 감자, 칠면조 몇 마리가 전부였지만,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의 표징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이웃 원주민들을 초대해 음식을 나누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추수감사절의 첫 기도였다. 가난과 고난의 자리에서 피어난 감사, 그 눈물의 예배가 한 나라의 전통이 되었다.
이쯤에서 문득 다른 민족들의 수확에 대한 감사절기가 궁금해 진다. 중국은 중추절(음력 8월15일), 일본은 오봉(양력 8월15일), 독일은 에른테단크페스트(10월 첫째주), 영국은 하베스트 페스티발(9월말-10월초), 인도(타밀)는 퐁갈(1월 중순)...
전통적인 농경사회의 추수 계절의 기준과 방법은 다르지만 감사 절기를 지키며, 풍요에 대한 감사의 보편적 가치는 동일하다고 본다. 우리 한민족은 추석(秋夕: 음력 8월15일)을 떠올리게 된다. 추석은 하늘과 조상, 그리고 이웃에게 감사의 예를 올리는 날이었다.
또한 추석의 밥상에는 나눔의 정신이 있어, 마을마다 음식과 과일을 서로 돌려 나누며 “감사합니다, 복 받으세요” 라고 인사를 건넨다. 그 인사 한마디 속에는 인간의 품격이 있었다. 감사는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보이지 않는 끈이 된다.
오늘날 우리는 그 끈을 놓치며 살아간다. 문명은 발달했지만, 마음은 삭막하다. 감사를 잃은 세상은 아무리 풍요로워도 가난하다. 불평은 삶을 어둡게 하지만, 감사는 영혼을 환히 밝힌다. 누군가 신에게 어떻게 해야 행복하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신이 말하기를 먼저 감사를 배우라고 했단다. 그래서 감사하는 사람은 언제나 행복하다. 풍요의 때뿐 아니라, 결핍의 때에도 감사한다. 왜냐하면 감사는 환경의 열매가 아니기 때문이다. 감사는 단순한 감정의 반응이 아니라, 모든 것이 은혜임을 깨닫는 영혼의 태도다.
감사는 얻은 것보다 받은 것을 헤아리는 마음이며, 갖지 못한 것보다 이미 가진 것을 기억하는 지혜다. 그래서 감사는 기억에서 시작된다. 과거의 은혜를 잊지 않을 때, 사람은 교만해지지 않는다.
감사는 시간 속의 기념비요, 영혼의 자서전이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 조상들의 헌신, 부모의 사랑, 선열의 희생, 이웃의 도움...오늘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화, 풍요는 수많은 이들의 눈물 위에 세워졌다. 공짜가 아니다.
그 모든 것을 잊지 않고 마음에 새길 때, 그것을 아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감사할 수 있다. 감사는 세대를 잇는 다리다. 하늘을 경외하고, 조상을 기리며, 이웃과 나누는 마음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길이다.
11월, 저문 들녘에 노을이 내려앉는다. 마지막 낙엽이 바람에 흔들리며 속삭인다. “모든 것이 은혜였다.”고...그 말에 마음이 고요히 젖으들며, 감사의 계절에 서서 조용히 묵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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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화/전성결대학장·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