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발언대] 우리는 하나

2024-01-22 (월) 박치우/남성복식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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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e are all one” 이라는 미국 대중가요가 있다. 언제 들어도 좋고 외로워 우울한 것도 없어진다. ‘큰마음’ 거기서 나오는 소리여서 그런 것같다. 마치 누가 말할 때도 큰마음으로 하면 듣기 좋은 것처럼. 그러나 자존 의식이 강한 마음에게는 헛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

그리고 세상 문제도 다급하고 시간적 여유가 없는 그 마음들의 탓이다. 큰마음들만이 있는 세상, 그것이 세상 사람들의 염원이다. 오랜 역사 속에 큰마음을 깨닫게 하는 위인들이 있다.

신라때 의상(義湘)대사의 법성게(法性偈)도 그런 가르침이다. 중생들이 읽을 수 있게 엄청난 분량의 화엄경을 모두 210자로 함축하고 7언 30구로 짧게 이루어져 누구나 웹사이트에서 읽어볼 수 있다. 종교적인 믿음보다 큰 마음 깨달음에 이르도록 구절마다 우주적인 차원의 법리(法理)로 이루어져 있다.


일반 물리학에서 배우는 것 같다. 우리는 삶의 깨달음을 위해 어느 종교에만 치우쳐서도 안된다. 종교적 선입견을 가질 필요도 없다. 기독교는 서양종교이지만 거기서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불교는 한때 국교였기 때문에 전통으로 느껴진다.

법성(法性)의 뜻은, 법은 일체의 존재이고 성은 그 성품을 의미한다. 처음 3구절(句節)이 중요해서 풀이해 본다.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법성은 원융하여 상이 둘이 없고, 제법부동 본내적(諸法不動 本來寂)/ 제법은 부동하여 본래 고요하다, 무명무상절이체(無名無相絶一切)/ 이름도 없고 상도 없어 일체가 끊겼다. 이 세상 모든 존재의 성품은 본래 움직이지도 않고 고요하고 이름도 없고 상도 없이 일체가 고요할 뿐이라고 해석된다.

우리가 살면서 어렵고 힘들 때 고요함을 취한다. 다 실없고 귀찮다, 조용히 쉬고싶음이 그 때문, ‘본래 적’ 그 자리로 돌아가고 싶은 것 아닐까, 이 시점에서는 그 참뜻을 이해 못하지만 후에 깨닫게 된다.

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 선(禪)은 중국에 불교를 전한 달마조사로부터 유래한다. 염불, 보살행 등의 수행법보다 앉아서 하는 좌선수행 화두 하나만으로 모든 생각을 버리는 소위 참선(參禪) 수행이 대표적이다. 세상 사람들끼리의 차별, 재산이 많고 적은 빈부의 차별, 권력이 있고 없고, 지위 상하의 차별, 이런 우열의 차별을 다 버리고 본래적으로 가면 “우리는 하나 (We are all one)”다.

그러나 법계 원리에는 존재의식도 있어 우리 모두 같은 삶 안에서 경쟁의식을 갖고 산다. 경쟁은 실로 상대와 싸움을 하는 것이지만 선의(善意)로 판별한다. 산업계에서나 스포츠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우리사회에 있는 빈부의 경쟁은 우리 인생살이를 늘 우울하게 만든다.

그래서 공산(共産) 혁명을 하여 누구나 평등하게 하려고 20세기에 세계 약 3분의 1이 공산주의권에서 살아보았다. 그렇지만 그 혁명의 이상이 훨씬 못미치며, 결국 마르크스 유토피아는 실현되지 못했다.

살면서 마냥 행복하지 않고 불행이 어쩌다 찾아오기도 한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어떤 시도를 해보지만 어떤 때는 심히 불안해져 한 세상 버리고 낙원 있는 곳으로 떠나고 싶다. 그럴 때면 “여보세요, 이 세상이 낙원인데. ”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또 법성게 끝구절을 읽어보면 ‘궁좌실제 중도상(窮坐實際 中道床)/ 마침내 실제 중도상에 앉으니 구래부동 명위불(舊來不動 名爲佛)/ 구래로 부동하니 이름이 부처이니라.’고 했다.

사람들에게 중도사상을 깨달게 하는 게송이다. 중도는 가운데 길이 아니며 양 극단이 먼저 이해 되었을 때에 중간으로, 삶에 최선으로 일상에도 자주 거론 된다. 이해하고 실행 하기 쉽지 않지만 이를 이해하고 실행하는 사람 있어도 누구도 내색(內色)하지 않아 알수 없지만 큰 마음씀이 보인다.

과대와 과소의 양 극단을 초월하여 평향 평중하지 않는 최적화 개념에 도달하는 이 철학은 서양의 아리스톨레(Aristotle)의 골든 민(Golden mean), 동양의 붓다(Buddha) 불교의 중도사상으로 철학적 심오한 뜻을 지니고 있다. 이를 실행하면 어떤 무엇에 대하여도 무리없는 평온함을 갖게된다. 이 세상에 극락은 없다. 중도로 사는 것이 만족스러운 삶이다.

결국 너도 나도 그런, 이미 저 세상에 먼저 가 있는 사람들도 또 우리가 후에 언제 가더라도 남아 사는 그들과도 ‘우리는 하나’ 그것이 영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태평한 마음 아닐까.

<박치우/남성복식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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