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세상만사] 뜸 들이기

2023-09-26 (화) 최효섭/목사•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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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말의 독특한 표현으로 뜸 들인다는 말이 있다. 밥도 쌀이 익었다고 먹지 않고 얼마동안 뜸을 들여야 맛이 난다. 된장 고추장 모두 얼마동안 뜸을 들인다.

결국 뜸을 들인다는 것은 발효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문화를 발효 문화라고도 부른다. 뜸이 들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한국문화는 기다리는 문화이다. 한국의 고전들 예를 들면 춘향전 심청전 등 모두 기다리는 이야기들이다. 사랑도 뜸을 들여야 하는 것이다. 얼른 사랑을 고백하지 않는다. 뜸을 들여 고백한다.

기다린다는 것은 다소 지루하지만 즐거운 일이다. 커피 한 잔 시켜놓고 다방에서 애인을 기다려 본 사람은 뜸 들임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를 잘 안다. 극장 앞에서 긴 줄을 서서 기다려 본 사람은 뜸 들여 기다림이 전혀 지루하지 않음을 안다.


기다림에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지루하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면 뜸 들임은 희망을 낳는 것이다. 소망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낳는다는 말이 성경에 나오지만 뜸 들임은 인생의 훈련과정이 될 수 있다. 지금은 빨리 빨리 시대로 무엇이나 속전속결로 나가지만 빠른 것이 성공은 아니다.

그러기에 지름길을 찾을 것이 아니라 정도(正道)를 걸어야 한다. 지름길 샛길 등은 좋아보여도 결과를 보면 역시 정도를 걸어야 한다. 바둑도 정수를 두어야 한다. 속임수는 즉시 응징을 당한다. 뜸 들여 사는 것이 정도이다.

종교는 모두 기다리는 과정을 밟는다. 명상 묵상 묵념 좌선 등 모두가 진리를 깨닫도록 뜸을 들이는 과정이다. 기다려야 깨달음이 온다. 마틴 루터는 긴 바티칸의 돌계단을 무릎으로 올라가는 힘들고 오랜 과정에서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신앙의 근본 진리를 깨닫고 개신교가 시작되었다.

믿음도 뜸을 들인 것이다. 예수는 천국 복음을 전하기 전 한적한 광야에 나가 40일 동안 명상함으로서 일을 시작하였다. 역시 뜸을 들인 것이다. 생각이라는 것이 뜸 들이는 것을 말한다.

소년단(보이스카우트)의 표어가 준비이다. 모든 행동에는 철저한 준비가 있어야 성공한다는 표어이다. 서둘면 실패하기 쉽다. 충분한 준비가 성공의 모체이다. 행동하기 전에 뜸을 들여야 한다.

일본 속담에 급하면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돌아간다는 것은 시간도 걸리고 좋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돌아가는 것이 더 빠를 수 있다. 직행이 좋아보여도 시간이 더 걸릴 수 있다. 인생항로에도 뜸을 들일 줄 알아야 성공한다.

나의 문학 동지 중에 유동식 교수가 있다. 그의 호가 유유(劉裕)이다. 그는 무엇이나 천천히 한다. 절대 서둘지 않는다. 그래서 성과 호를 함께 부르면 유유유가 된다. 그러나 그는 동경대학 철학 박사 학위를 가졌다. 박식하지만 표현하지 않는다.


웃음도 천천히 웃는다. 말까지 뜸을 들인다. 그러기에 그는 실수라는 것이 없다. 나는 심장의 관상동맥이 막혀 심장수술을 받은 일이 있다. 성공율 20%라는 어려운 수술이다. 창문 밖에 견학하는 외과 의사들이 많았다.

하친슨 박사는 수술에 앞서 견학하는 의사들에게 말하였다. “어려운 수술일수록 절대 서둘지 마시오. 차분하게 마음을 가다듬고 시작해야 합니다.” 수술도 뜸을 들여야 하는 것이다.

나는 일요일 예배시간보다 15분 일찍 도착하여 눈을 감는다. 기도라기보다 명상이다. 내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이다. 세상의 생각들을 잠재워야 예배를 제대로 드릴 수 있다. 다른 생각을 하면 설교도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명 설교자보다 명 청취자가 있어야 한다. 뜸 들이기는 종교에 특히 필요한 것 같다.

<최효섭/목사•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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