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발언대] 잊혀진 영웅들

2023-09-14 (목) 이상민/공인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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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0분의 1. 인천상륙작전의 성공확률이다. 상륙하기엔 최악의 조건이기에 성공이 희박하다는 의미로 표현된 수치일 것이다.

조수간만의 차가 9m나 되고, 물이 차있는 만조시간은 2시간이다. 게다가 항로가 좁고 구불구불하기까지 하다. 실패할 경우 모든 군함이 3km가 넘는 갯벌에 정체돼 낭패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참모들은 반대했다.

맥아더 장군은 ‘이 작전은 반드시 성공한다. 아무도 섣부른 짓을 하지 않는다고 믿기에 허를 찌를 것이다.’라는 말과 함께 용단을 내렸다.
작전개시 한달 전 맥아더 사령관은 우리 군에게 특수임무를 요청한다. 적군과 모습이 같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우리 국군만이 수행 가능한 첩보공작의 임무였다. 이것이 X-ray 작전이다.


적의 상태를 훤히 들여다본다는 의미에서 지어진 작전명이다. 전 해군참모총장 함명수 제독(당시 해군 소령)이 지휘를 맡았다.
17명의 첩보원은 모두 미혼자로 구성됐다. 작전기밀이 사전에 누설되지 않기 위함과 생포되더라도 가족을 염려할 필요가 없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첩보부대는 전쟁발발 두 달 뒤인 1950년 8월 24일 영흥도 잠입에 성공했고 그 후 월미도를 거쳐 인천시에 입성해 첩보활동을 전개한다. 몇 주 동안 적의 해안포 위치, 병력과 물자 규모 등을 파악해 맥아더 사령부에 보고했다.
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해 항만의 상태, 암벽의 높이까지 정확하게 쟀고 해안에 설치된 기뢰까지도 제거했다.

첩보원들은 도움도 받았다. 인천시민들이 몰래 숙식을 제공했고 북한군 보안원들(권상우, 김정국)을 설득해 시내 통행증을 발급 받아 감시의 눈을 피해 다닐 수 있었다. 이 두 보안원은 살기 위해 할 수 없이 북한을 돕던 사람들이다.

9월 13일 첩보부대는 임무를 마치고 11명은 후퇴를 시작했다. 이 중 6명은 마지막 일을 처리하느라 남았다가 9월 14일 적의 대대와 전투를 벌이게 된다. 임병래 소위와 홍시욱 이등병조는 동료 넷을 후퇴시키고 적에게 포위되자 자결로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들은 끝까지 상륙작전의 비밀을 지키려고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9월 14일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미군에 소속된 켈로(KLO)부대원들이 팔미도에 도착해 등대를 밝혔다.
환하게 밝혀진 등대의 안내를 따라 9월 15일 새벽 드디어 261척의 함선은 일제히 인천 앞바다에 모습을 드러냈고 함포에 불을 뿜었다.

연합군 7만5,000명은 별 희생없이 순식간에 모두 인천에 상륙한다. 완벽한 성공이다.
인천을 탈환한 연합군은 곧이어 서울로 향했고 13일 후인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된다. 이에 힘입어 낙동강에서도 반격이 시작됐다. 부산을 위협하던 10만의 인민군은 혼비백산하여 도주했다. 38선을 넘어 탈출한 인민군은 고작 3만에 그쳤고 북한은 자력으로 전쟁을 수행할 힘을 완전히 잃었다.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 장군과 연합군의 힘으로만 펼쳐진 것처럼 알려져왔다. 가장 중요한 밑거름이 된 우리의 활약은 잊혀질 판이었다.
공산화될 뻔 했던 순간 우리에겐 나라를 구한 영웅들이 있었다. 17명의 첩보부대원들, 켈로부대원들, 두 명의 북한보안원, 그리고, 인천시민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 작전 후 일계급 특진한 함명수 중령, 고 임병래 중위, 고 홍시욱 삼등병조 3명은 미국이 외국군에게 주는 최고훈장인 은성무공훈장을 받았다.

<이상민/공인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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