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나의 생각] 미국에 와서 살다

2023-09-08 (금) 이혜련/테네시 내쉬빌 독자
크게 작게
나의 신혼인 광주 생활이 시작되었다. 방 한칸에 다락, 부엌이 있는 곳에서 살았다. 단칸방에 사니 밥 먹고 나면 소화가 안되었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마당부터 쓸고 찬물에 빨래도 했다.

우리집 셋방에 엄마와 엄마 친구인 마라손 아줌마가 놀러왔다, 광주 시청앞에 사는 마라손 아줌마는 “너, 나중에 남편이 병원 차리면 나 대접 잘하거라” 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초년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을 믿었다. 성경에도 궁핍에 처하기도 하고 부하게도 처한다는 말이 딱 맞다. 광주에서 집 유동 가까이에 있는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남편도 같이 나갔다. 사모가 나와 같은 이대 사회생활과 선배였다.
남편이 일하는 미 공군 비행장에도 가보고 엄마가 오시면 같이 미군 식당에 가서 양식도 먹어보았다. 남편이 고기덩어리인 스테이크를 시켜먹는 것을 보았다. 고기덩어리가 징그러웠다.


광주에서 6개월을 보내고 남편은 경북 봉화군 임기리에 있는 칠월산 공군 레이다 기지에 군의관 발령이 났다. 나는 임신한 몸으로 이삿짐을 들고 공군 사택 맨끝집으로 이사를 갔다, 다행히 바로 옆에 집과 교회 종이 있고 교회 전도사님이 서울에서 와 있었다. 그 전도사가 우리집에 심방을 왔다.

그곳은 강원도와 접경지대이고 삼척이 가까워서인지 연탄이 싸고 화력이 세어 불이 안꺼졌다. 아들은 엄마의 젖을 먹고 무럭무럭 잘 자랐다. 펌프질로 물을 길어 사용했는데 저녁이면 팔이 아팠다.

아기가 칭얼대며 쉽게 잠을 못자면 남편이 안고서 잠을 잘 때도 있었다. 우리 부부는 아들을 너무 사랑했고 아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나는 이때부터 기도를 열심히 올리기 시작했다.

그 아들은 변호사가 되었고 지금은 두바이 미국 대사관에서 일한다. 두 손녀도 있다. 이 아들네 식구는 아이들이 방학이 되면 일년에 한번씩 우리집에 온다. 여름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내가 환갑때 딸과 함께 두바이를 다녀왔다. 작년 크리스마스에는 남편이 두바이를 다녀오면서 로얄젤리 한 병과 두바이 비누, 한국 로션을 3개 샀는데 탑승 검색대에서 로션은 액체라서 압수당했다고 한다. 두바이 세숫비누는 세수할 때 눈이 안아파서 좋다.

이후 미국에 와서 살면서 남동생을 초청이민 하게 했고 지금 애리조나 피닉스에서 한의사로 개업 중이고 수시로 우리집에 다니러 온다. 여동생도 테네시주 윈체스트에 살고 있다.

남편은 뉴욕 메디컬 칼리지에서 인턴, 레지던트를 했고 코니아일랜드 병원을 거쳐 브롱스의 한 병원에 레지던트십으로 일하기도 했다. 지금은 테네시주 내쉬빌에 살고 있다.

성경 잠언에 부지런한 남자는 재산을 일군다 한 것처럼 남편은 아파도 직장에 결석 한 번 안하고 출근했고 나도 아끼고 살아서 노후인 지금 돈걱정은 안하고 살고 있다. 나는 교회 여전도회 회장, 성가대원을 했고 집사로 대중기도도 했다.

그동안 엄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도 2년간 식물인간으로 계시다 돌아가셨다. 내년에 한국에 가면 엄마, 아버지, 다른 가족의 납골당에 가 볼 생각이다. 모두가 옛날 일이 되었다.

<이혜련/테네시 내쉬빌 독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