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전망대 - 기적 아닌 일이 없다

2023-07-17 (월) 이태상/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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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일 정말 알 수 없는 것일까. 하늘의 별을 따는 일처럼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던 일도 현실이 될 때가 있었다. 한국에 살면서 간혹 (인천 공항이 생기기 전) 김포 공항에 누구를 마중 또는 배웅하러 갈 때면 비행기에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마치 별세계 사람들 같아 보였다.

그러던 나에게도 그토록 부러워하던 기회가 뜻밖에 찾아왔다. 우연히 영자신문에서 구인 광고를 보고 미국 출판사 프렌티스-홀(Prentice-Hal)의 한국 대표로 2년 일한 후 능력을 인정받아 호주로 전근 오퍼를 받았으나 그 당시 호주 정부에서 비유럽계 사람에게는 영주 비자를 주지 않는다고 해서 호주 대신 나는 영국으로 전근 가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세계를 주름잡던 대영제국의 콧대 높은 영국신사들이 정중하면서도 음성적으로 베푸는 냉대와 차별대우를 감당키 어려웠다. 영국에 인재가 없어서 한국에서 사람을 데려왔냐는 반감에서 반발이 대단했다. 그럴수록 저들에게 짓밟히고 웃음거리가 될 수 없다는 심한 강박관념에서 나는 초인적으로 발악하듯 열심히 뛰었다.


스코틀랜드와 웨일스를 포함한 영국의 각 대학을 순방, 프렌티스-홀 산하 50여 개 출판사에서 매년 발행하는 신간 서적 수천 권 가운데서 대학 과목별로 교재를 채택시켰다.
연평균 200회 이상 이동도서전시회를 열어 교수들과 학생들로부터 도서 추천과 구매신청을 받아 각 대학 도서관에 납품하는 일도 하면서 또 각종 학술대회와 학회에 참석해 학계 동향을 파악하고 새 교재 집필자를 물색하는 등 미친 듯이 일을 했다.

영국에서의 생활이 안정을 찾아가고 있을 때 싱가포르에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여 나는 싱가포르로 전근 발령을 받게 되었으나 전근 조건이 너무 부당했다. 외국인으로서 응당 받게 되는 주택비, 자녀 교육비 등의 특별수당과 혜택도 없이, 같은 동양인이라고 현지 싱가포르 사람과 같은 대우밖에 못 해주겠다는 것도 어이가 없었다.

당한 조건으로는 싱가포르 전근을 받아들일 수 없다 하자 즉시 나는 감원 해고를 당하고 말았다.
퇴직금으로는 한국에서 근무한 연수는 제외하고 영국에서 근무한 기간만 일 년에 일 주일분 급료를 계산해 줄 뿐, 나의 가족이 한국으로 돌아갈 비행기표와 이사비용조차 주지 않았다. 그런 비용을 회사가 부담하겠다는 서면의 고용계약이 없다는 설명이었다.

너무도 억울하고 분해 나는 런던의 유명한 변호사 십여 명을 찾아 의논해 보았으나 모두 이구동성으로 법에 호소해 보았자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어 나는 영국 언론에 편지를 써 호소했다. 그랬더니 뜻밖에도 런던 타임스와 가디언 그리고 우리 가족이 살고 있던 지역의 지방지 이브닝 포스트 에코에서 나의 억울한 사정을 크게 기사화 해주었다.

그래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생각다 못해 나는 우리가 사는 지역구 출신의 노동당 국회의원 브라이언 세지모어 씨를 찾아가 하소연하자 영국 국회에서 문제 삼겠다며 강력한 편지를 써주고 회사 대표를 만나보기까지 했으나 이 또한 헛일이 되고 말았다.

마지막 수단으로 나는 인더스트리얼 트라이뷰널이라는 노사분쟁 중재 재판소에 제소했다. 그러자 회사 측에서는 미국 변호사 두 명과 영국 변호사 두 명, 총 네 명의 변호사가 회사 변호에 나섰고, 나는 변호사 쓸 돈도 없었지만 승산이 전무하다는 법적 판단하에 아무도 변호를 맡아주려 하지 않아, 내가 직접 나 자신의 자가변호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일 년을 두고 끌어온 재판이 드디어 판결의 순간을 맞았다. 뜻있는 곳에 길이 있다 했던가.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깨겠다는 집념과 오기로 일관한 나의 법정투쟁에서 재판장은 물론 고용주 편에 서야 할 재판관까지 내 편을 들어줘 다수결이 아닌 만장일치로 나는 승소했다. 심지어 회사 측 변호인들로부터 찬사와 축하까지 받았다.

세상에는 기적 아닌 일이란 없는 것 같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부터 그렇고 살아온 순간순간이 다 기적이다.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이슬 한 방울, 바람 한 점, 햇살 한 줄기, 바다, 하늘, 별 등등 모두가 기적이다. 한없이 신비하고 슬프도록 아름다운.

<이태상/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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