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살며, 느끼며 - 여왕의 안식처

2022-09-23 (금)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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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96세 나이로 서거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국장이 19일 마무리되면서 윈저성 세인트 조지 예배당(St George’s Chapel)에 안장됐다. 작년 4월에 별세한 필립공의 관은 납골당에 보관돼 있다가 여왕과 함께 묻혔다.

조지6세 기념 예배당은 1969년 세인트 조지 예배당 북쪽에 만들어진 석조별관으로 바닥에 돌무덤이 있다. 이곳에는 여왕의 아버지 조지 6세와 어머니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동생 마거릿 공주도 안장돼 있다.

윈저성은 런던 중심부에서 서쪽으로 약 35Km 떨어진 곳으로 여왕이 머물 때는 둥근 탑 꼭대기에 영국 국기 대신 왕실기가 게양되었다.


10여년 전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다. 여왕이 머무는 곳치고 참으로 조용하고 평범한 시골로 차도 가운데 빅토리아 여왕의 동상이 있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 제국을 건설하고 영국의 산업 문명을 전세계에 알린 여왕이다.

언덕을 올라 성 입구로 들어서면 거대한 성벽을 마주하게 된다. 높은 석조건물들이 거대한 성벽과 성문으로 둘러싸여 있어 견고하고 치밀한 요새 같은데 온기라고는 없어보인다. 성벽 아래는 온갖 식물과 꽃들이, 의자가 놓여있었다.

윈저성은 세 구역, 로어(Lower), 미들(middle), 어퍼(upper)로 나뉘어져 있다. 어퍼워드에는 스테이트 아파트먼트가 있는 곳으로 주로 여왕이 공식행사를 할 때 사용하는 방이 있다. 군주들 초상화, 루벤스와 뒤러의 그림, 왕실 보물들이 장식되어 있다. 가장 반가웠던 것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노트였다. 누렇게 바랜 노트에 그려진 스케치는 얼마나 꼼꼼하고 섬세한 지 할 말을 잊었었다.

그리고 관심 있는 곳이 성의 제일 아랫부분에 있는 세인트 조지 예배당이었다.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1066년 에드워드부터 1760년 조지 2세까지 30명의 국왕이 묻혔고 조지 2세 이후의 왕들은 이곳에 영면해 있다.

이곳은 중세 후기 수직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성채로 에드워드 3세에 의해 14세기에 세워져 많은 왕실 예배, 결혼식, 장례식이 치러졌다.

특히 이 예배당에 강한 전제군주 헨리 8세(1509~1547)와 세 번째 부인 제인 시모어가 묻혀있다. 왕비를 두 명이나 처형시킨 비정의 왕은 종교개혁을 한다며 수도원을 해산시켜 왕가의 재산으로 만들었다. 또 내전에서 참수당한 찰스 1세의 잘린 목을 도로 몸에 꿰매어 묻은 곳이기도 하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1952년 즉위하여 70년 7개월동안 식민지들의 독립, 세계전쟁 전후의 가난, 냉전, 공산주의 몰락, 유럽연합 창설과 영국의 탈퇴 등 영국의 격변기를 지나왔다. 인류 역사상 듣도 보도 못한 코로나19도 겪었고 핵전쟁 공포, 기후변화와 경제 위기도 보았다.


여왕은 매년 의회 개회식에서 1.06 Kg의 왕관을 쓰고나와 내년도 주요입법안을 읽었다. 2018년 여왕이 “연설문을 위로 들어 올려야 한다, 안그러면 목이 부러질지도 모른다.”고 말한 그 왕관의 무게란! 그런데 왕관을 벗자마자 남아공과 인도는 각각 왕관에 박힌 317캐럿 다이아와 홀에 박힌 105.6캐럿 다이아를 자기네 것이라고 돌려달라고 한다. 식민지 배상과 사과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영연방 국가를 중심으로 군주제 회의론이 커지고 있다. 스코틀랜드는 다시 분리 독립에 나설 가능성도 있다. 내년에 대관식을 열 새국왕 찰스3세는 잘 해 나갈까?

원래 삶과 죽음은 하나라고 한다.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여왕 역시 생전에 기쁨, 행복이 큰 만큼 슬픔과 고통, 불행도 그만큼 컸을 테고 삶이 너무 버겁다고 느낀 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이제 무거운 왕관을 내려놓았다.

세인트 조지 예배당 기프트샵에서 뉴욕으로 가져온 것은 단 하나, 라벤더 방향제였다. 칙칙하고 어두운 권력과 죽음의 냄새를 맡은 것인지, 느낀 것인지 그때 뭔가, 상큼하면서도 온화한 향이 필요했던 것 같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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