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웨체스터 이야기 - “빨간 모자 레스토랑”

2022-09-22 (목) 노 려/전 한국일보 웨체스터 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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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빙톤(Irvington)기차 길을 건너는 다리로 올라서면 강이 보인다. 운전하는 몇 십 초 동안에 가슴 안으로 강물이 밀려든다.

기차역을 끼고 강쪽으로 향하자 마자 강가에 탁 트인 넓은 주차장이 펼쳐진다. 세상에 어디 이런 곳이 있을까. 한쪽으로는 나즈막한 병풍처럼 둘러진 강 건너 뉴저지를 연결해주는 미국에서 제일 길다는 마리오 쿠오모 다리가 하늘 높이 솟아 있고, 정말로 하늘 높이 솟은 맨하탄 빌딩 숲은 여기서는 아득히 저 멀리서 아른거린다.

허드슨 강변 식당 주변은 강과 하늘과 강 건너 언덕까지 아울러 적막하다. 밥 먹으러 가는 마음이 숙연해질 정도이다. 한국처럼 매운탕과 조개구이를 파는 식당으로 왁자지껄 몰려드는 인파의 흥청댐이 없다. 그냥 조용할 뿐이다. 강쪽에서 들리는 출렁소리가 들릴 만큼, 내 마음속 물소리가 들릴만큼…


아마도 ‘빨간 모자’ 이름 때문인가, 내가 이 식당을 좋아하는 이유가?
빨간 모자라는 말에서는 빨간색 모자를 쓴 여자가 떠오른다. 남자도 어린아이들도 다 빨간색 모자를 쓰는데도 말이다. 그것도 아무 여자가 아니라 중년을 넘긴 여자다.

사람들과 부대끼는 세상살이로 어수선한 마음을 강물에 내려 놓아 본다. 강물과 대화는 되지 않는다. 무심코 흘러만 가니까. 그래서 좋다. 어떤 그럴듯한 이론이건 고마운 충고이건 아무런 좋은 말이 필요가 없는 나이다.

인간에게 평등이 있는 것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영국여왕의 장례절차. 그 중에도 영국 귀족여성들의 모자에 유난히 눈이 갔다. 입은 옷과 매치가 되는 하이패션이면서도 그 자체로 예술이다. 그에 비해 프렌치 레스토랑 ‘레드 햇’의 모자는 평민 여성이 멋을 부려보느라 한번씩 써보는 그런 수수한 모자이다. 그렇다해도 나는 빨간색의 모자는 쓰지 못할 것 같다.

허드슨 강가 레스토랑이 꽤 많다. 용커스에 있는 유명 세프의 X2O 를 위시해, 하베스트 언 더 허드슨(Harvest on the Hudson), 해프 문(Half Moon) 등등. 그 중에도 동네 아줌마들과의 점심이라든가, 맨하탄에서 오는 친구 또는 한국서 친구가 오거나 할 때는 ‘레드 햇’이다. 저녁은 또 어떤가. 서쪽 뉴저지 언덕으로 내려가는 해가 웅장하게 강을 붉게 물들이니 멀리서 온 손님접대에 최적이다.

‘레드 햇’은 지난 몇 년동안 무섭게 덮쳐온 지구온난화로 심한 피해를 입었었다. 샌디 허리케인에 식당 안까지 물이 찼었고, 작년 뉴욕을 휩쓸고간 폭풍은 팬데믹과 함께 치명적이었다.

지금은 수, 목, 금, 토, 일 닷새 만 문을 연다. 값은 올리고 음식양은 줄이면서 대충 손님을 받는 것이 아니라 손님 하나에라도 제대로 정성을 보여준다. 그래서 기회가 되면 이곳을 찾는다.

처음 온 친구들이 “와아 참 좋다” 할 때에 나도 기분이 좋아진다. 강을 보며 나이를 생각하던 마음은 사라지고 전혀 심각하지 않은 수다에 몰입이 된다.

‘맛있는 음식과 즐거운 대화’라는 궁합이 어디 또 있을까. 식당을 나와 황량한 주차장으로 걸어가면서 다시 심호흡으로 강바람을 들이마신다. 마음을 내려 놓고 속없는 말들을 쏟아냈으니 다음에 ‘레드 햇’에 올 때까지 또 다시 될수록 ‘제대로 살기’ 위해 애를 쓰려고 속세로 돌아간다.

<노 려/전 한국일보 웨체스터 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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