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과 생각 - 산책은 ‘맨하탄의 센트럴파크’ 이다

2022-09-09 (금) Paul Kim/재미부동산협회 상임이사·전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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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에 있어서 산책이 갖는 의미를 한 마디로 정의하라면 ‘맨하탄의 센트럴파크와 같다’라고 말하고 싶다. 센트럴파크가 없는 맨하탄을 역으로 상상해 보면 산책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과 그 가치를 쉽게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센트럴파크 조성을 주창한 시인이자 저널리스트인 윌리엄 브라이언트의 ‘뉴욕에 센트럴파크가 없다면 100년 후 똑같은 크기의 정신병원이 생길 것’이라는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오늘날 맨하탄이 회색도시에 머물지 않고 세계최고의 관광도시와 금융도시의 명성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센트럴파크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일요일엔 특별한 약속이 없는 한, 이른 아침에 센트럴파크로 산책을 나간다. 이스트방면 5번 에비뉴와 90번가 정문에서 출발하여, 큰 외곽 6.1마일을 2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속도로 걷는다.


1만 2,000보 이상의 걸음이니 만큼 상당한 운동량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산책은 내게 건강증진 이상의 의미가 있으며, 산책이 내 삶에 찾아와 자리매김 한 것은 참으로 감사한, 큰 행운이다.

아침에 벌떡 일어나지 못하고 미적대는 것 처럼 산책길에 나서기 전에 잠깐 망설이기도 하지만, 막상 발걸음을 떼어 놓으면 마음이 가볍고 자유로와 지는 것을 느낀다. 일종의 해방감과 비슷한데,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한 가지에 사로잡혀 있던 생각이나 짓눌려 왔던 부담들이 천천히 걷는 동안 자연스레 흩어지고 풀어지면서 정리가 되며, 나아가 새로운 계획도 떠오르고 의욕도 샘솟는다. 그래서 산책을 흩어질 산(散), 꾀 책(策)이라 하나 보다.

요즘처럼 정보는 넘쳐나고 정세가 급변하는 시국에, 그래서 하루 24시간도 부족해 촌음을 아껴가며 바쁘게 사는 이 시대에 산책타령을 늘어놓는 것이 한가해 보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책에 그 귀중한 시간을 흔쾌히 뚝 떼어 할애하는 분들의 용기와 결단을 높이 사고 싶다.

어려웠던 시절, 적은 월급일 망정 최소한의 생활비를 뺀 금액을 눈 딱 감고 자식 대학등록금등 여러 명목으로 나누어 정기적금에 꾸준히 부으며 살아오신 부모님 세대의 헌신을 존경하는 마음과 같은 맥락이다. 왜냐하면 시간이나 돈을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는 결국 선택의 문제인데, 건강한 미래를 위해 투자한다는 것은 그 삶의 방향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산책은 빠듯한 우리 삶에 여유를 전해 주는 메신저 역할을 한다. 두 다리로 사뿐사뿐 걷는 길 위에서 피어나는 생각의 향기를 따라 가다 보면 아등바등 놓치지 않으려 했던 것 이상으로 다시 새로운 무언가가 채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여유는 발끝에서 시작되어 심장을 통해 데워지고 머리끝에서 풍겨 나온다.

이제 가을이다. 걷기에 참 좋은 계절이다. 우리가 사는 주위를 둘러보면 너무도 아름다운 산책길이 즐비하다. 잘 다듬어진 크고 작은 공원과 시원하게 쭉 뻗은 바이크레인이 곳곳에 산재해 있으며, 약간의 힘만 보태면 오를 수 있는 산등성이도 가까운 곳에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뉴욕은 실로 무궁무진한 도시이다.

운전을 하면서는 바깥 풍경만 슬쩍 보고 그냥 스쳐 지나치기 쉽지만, 가까이 다가가 천천히 걷다 보면 마치 어린 시절 숨겨진 보물을 찾았을 때의 소박한 기쁨이 떠오르고, 놓치고 살아 왔던 뉴욕 생활의 참맛을 하나 둘 추가하는 즐거움을 알게 된다. 이 가을, 산책을 통해 뉴욕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행복을 누리시기를 기대해 본다.

<Paul Kim/재미부동산협회 상임이사·전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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