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독서 칼럼 - 고엘 정신

2021-01-25 (월) 김창만/목사·AG 뉴욕 신학대학(원)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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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엘(goel)’은 뜻밖에 당한 형제의 고통이나 어려움을 보고 모른척하지 않는다는 한 가족 의식과 자비로운 형제애를 말한다. 가나안 땅에 처음 입성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타 종족보다 문화, 경제적으로 열등했다. 이 시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뼈저리게 배운 것은 ‘고엘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을 책임지신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로마에게 멸망한 이후에 이스라엘 민족은 2,000년 동안 세계를 유랑하며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어디를 가나 고엘 정신을 되살려서 그들의 공동체를 안정시켰고, 세계에서 사회관계 구성이 가장 발달한 부강한 나라로 만들었다.“ (이키엘 엑스타인의 ‘Jews and Judaism’ 중에서)

홀로코스트의 위세가 아직 살기등등하게 뮌헨을 뒤흔들 때의 일이다. 나치 친위대가 버스를 정차시키고 올라와 외쳤다. “한 사람도 움직이지 마시오. 신분증 검사합니다.” 버스 뒤에는 신분증 없는 유대인을 체포하여 수용소로 호송할 군 트럭이 대기하고 있었다. 버스 맨 뒷자리에 웅크리고 앉아있던 시프라(Shifra)라는 중년 여인은 순간의 공포와 두려움으로 온 몸을 떨기 시작했다.


시프라 여인 옆에 않아있던 한 중년 신사가 물었다. “부인, 왜 그렇게 두려워 떠십니까.” “제겐 신분증이 없습니다. 전 유대인입니다. 저들이 나를 수용소로 끌고 갈 것입니다.” 새파랗게 질린 시프라 여인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떨고만 있었다.

그때 그 중년 신사의 얼굴이 갑자기 험악해졌다. 시프라 여인을 향하여 손가락질 하며 큰 소리로 욕을 해댔다. “이 멍청하고 한심한 마누라야, 내가 정말 미치겠다. 미치겠어.”
나치 친위대원이 왜 그렇게 고함을 지르고 야단이냐고 물었다. “아니 제 마누라가 신분증을 또 잃어버렸다내요. 정말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친위대원은 중년 신사의 어깨를 두들기며 한바탕 웃고 지나갔다.

그 신사는 유대인이었다. 그리고 그는 지혜와 자애를 갖춘 ‘고엘러’(goeler)였다. 시프라는 그 이후 다시 한 번도 그 신사를 보지 못 했다. 고난당하는 형제를 보호하고 책임지라는 고엘의 명령을 이스라엘 사람은 어디서나 엄숙하게 실천한다. 뮌헨의 버스 안의 무명 신사와 룻기의 보아스 같은 고엘러는 지금 어디 있는가.

<김창만/목사·AG 뉴욕 신학대학(원)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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