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석류

2020-10-26 (월) 이한나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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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일 가게 석류 가판대에는
하나에 4.99 달러 가격표 아래
겨울 들바람 맞은 소녀의 볼 같은
석류들 앉아있다

우유처럼 뽀얗게 솟아나와
우리를 옹골지게 키운
젖무덤 탐스러워,

형광 불빛 퍼지는 수술대 위
홀로 누워 몽롱해지는 의식 저편,
아이들 웃음소리 아득히 멀어진다
석류 씨 뱉어내듯 금속 집게에 실려
조금씩 뜯겨나가는 병든 유방
생명 위해 자르고 버리는,
내 사랑하는 이에게도 그런 세월 있었다


버려진 석류 씨 한 알
깊은 동굴 어둠 헤치고 푸른 싹 틔우듯
빈 젖무덤 속, 눈물 몇 줄기
또 하나의 석류나무 싹 틔우리


시작노트: 유방암으로 고통 받는 세상의 모든 여성들을 위하여

<이한나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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