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기도(棋道)’

2020-09-21 (월) 김창만/목사·AG 뉴욕신학대학(원)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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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바둑계의 거성 세고에 겐사쿠(漸越 憲作)선생은 평생 세 명의 제자만 받아 기른 것으로 유명하다. 제자에게 입숙료를 받거나 사례를 받는 일도 없었다. 한 집에 가족 같이 지내면서 세 제자를 길렀다.

세 제자는 일본 바둑계의 정상급인 우칭위안, 일본 기성전을 아홉 번이나 우승한 하시모토 우타로 그리고 한국인 조훈현이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세계 바둑계의 제 1인자가 되었다. 국수 조훈현 9단은 일본인 스승 세고에게 심오한 ‘기도(棋道)’. 바둑의 도를 배웠다.“(조훈현의 ‘고수의 생각법’ 중에서)

세고에 선생이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 중에 내기바둑이 있다. 조훈현이 2단 이었을 때, 6단을 가진 한 선배가 집요하게 내기바둑을 간청하는 바람에 한번 허락한 적이 있었다. 승부는 한 판에 일본 돈 100엔이 걸린 3판 2승제였다. 소문을 들은 연구회 멤버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조훈현이 내리 여섯 판을 이기고 나니 6단 선배는 그제야 풀이 죽어 물러섰다. 상대방은 600엔을 놓고 떠났다.

며칠 후 세고에 선생이 조훈현을 조용히 내실로 불렀다. 선생이 말했다. “내기 바둑을 두었느냐?” “네”. 조훈현은 대답했다. 선생이 말했다. “지금 내 집을 떠나라. 너는 바둑을 공부할 자격이 없다. 나와의 인연은 이것으로 끝이니 한국으로 돌아가거라.” 파문당한 조훈현은 갈 곳이 없었다. 식당의 접시 닦는 일을 얻어 겨우 생계를 해결했다.

한 달 쯤 지났을 때다. 스승이 불렀다. 조훈현은 스승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세고에 선생은 두 눈을 감고 말했다. “내가 너를 처음 보았을 때 네가 제 1인자가 될 재목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문제는 재주가 아니라 인품이다. 이 녀석이 바둑 명인에 걸맞는 인격과 품위를 갖출 수 있을까, 이것을 늘 생각해 왔다. 너는 명심해라. 인격적 결함을 가진 자는 바둑의 고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9년의 긴 세월동안 조훈현은 이런 방식으로 세고에 선생의 슬하에서 바둑을 배웠다. 바둑기술을 배운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대하는 겸손한 예의, 상대방을 이기기 전에 먼저 자신을 이기는 절제, 경건한 자세 등을 조훈현은 몸으로 배웠다. 이것으로 조훈현은 기도를 중시하는 바둑의 고수가 되었다. 새뮤얼 러버는 말했다. “우리가 처한 상황들은 약한 자에게는 주인이며 현명한 자에게는 도구가 된다.”

<김창만/목사·AG 뉴욕신학대학(원)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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