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뉴저지 타운에 들어온 한류

2020-09-14 (월) 채수호/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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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운의 CVS매장에 최근 흥미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카운터 계산대 바로 옆에는 방탄소년단을 커버스토리로 다룬 타임지 특별판이 스탠드에 꽂혀있고 화장품 코너에는 ‘K-Beauty’ 라는 사인 밑에 여러 종류의 한국산 화장품들이 진열되어있었다. 한류는 중부뉴저지 작은 마을, 콧대높은 백인타운 깊숙히 들어와 있는 것이다.

젊은 세대에게는 K-Pop, K-Drama, K-Beauty같은 한류 현상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지 모르지만 필자처럼 이전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천지가 개벽하고 상전(桑田)이 벽해(碧海)된 듯한 신기한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던 해 태어난 필자는 1950년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6.25 동란이 일어나자 때로 걷고 때로는 엄마 등에 업혀서 피난을 갔다.


국민학교(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유네스코와 유엔 한국지원단(UNKRA)에서 마련해 준 교과서로 공부했고 학교에서는 원조물자로 들어온 탈지분유와 밀가루를 나눠주었다. 4, 5월 춘궁기(보리고개)가 되면 도시락을 못 싸와 수돗물로 배를 채우는 아이들이 많았고 영양부족으로 도장병이라는 머리 부스럼을 앓는 아이들이 유난히 많던 시절이었다.

인분을 거름으로 쓰던 때라 시골 마을은 온통 인분냄새로 진동했고 상하수도 시설이 미비해서 주로 우물물을 먹고 생활하수는 개울이나 도랑에 버렸다. 전기가 안들어오는 지역이 많았고 들어오는 곳도 툭하면 전기가 나갔다.

어른들은 한국이 미국과 일본에 각각 100년, 50년 이상씩 뒤져있으며 아마도 영원히 따라가지 못할 것이라는 자조섞인 이야기들을 많이 하였다.

초등학교 육학년 되던 해 이기붕씨를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4.19 학생의거가 일어났고 일주일 후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겠다며 홀연히 하야했다.

큰 가방 하나만 들고 부인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하와이로 망명하는 쓸쓸한 노 대통령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4.19 이후 사회는 연일 계속되는 데모로 극심한 혼란 속에 빠져들었다. 이듬 해인 1961년 박정희 소장이 주도한 5.16 군사혁명이 일어났다.

5.16 후 한국의 진로는 농업국에서 수출위주의 공업국으로 대전환을 하게 된다. 처음에는 사람들의 머리카락을 수집하여 가발을 만들어 미국에다 팔았고 농수축산물과 수공예품에서 부터 지렁이까지 돈이 되는 것은 모두 내다가 외국에 팔았다. 물건 뿐 아니라 광부와 간호사 등 인력도 수출하였고 월남전에 군대도 파병하였다.

1965년 한일회담 성사후 일본으로부터 받은 청구권 자금과 해외 근로자들의 송금, 그리고 파월장병들이 부쳐온 돈으로 외화가 쌓이자 섬유 전자 등 경공업을 중심으로 제조업에 집중 투자를 하였다.


원활한 물류를 위하여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었고 도로, 항만, 전력 등 인프라 구축에 박차를 가하여 온 나라가 건설공사장처럼 되었다. 근면, 자조, 협동의 새마을 운동으로 국민들에게 하면 된다는 자신감과 부지런하고 진취적인 기풍을 불어넣었다.

그로부터 50여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낙후된 후진 농업국이던 대한민국은 불과 반세기 만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한 세계의 일류 선진국으로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뉴저지의 작은 타운 CVS 매장에까지 들어온 한류의 물결이 일시적인 현상에 그치지 않고 앞으로 더욱 더 힘차게 세계로 뻗어 나가기를 기대해 본다.

<채수호/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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