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무엇을 부끄러워해야 하나?

2019-08-22 (목) 한영국/소설가
크게 작게
고등학생들이 포트리에 세운 위안부 기념비가 창피하다는 한국계 어른이 있었다. 창피한 역사를 남의 나라 땅에 동상으로까지 세워야 겠느냐는 것이 이유였다. 그래서 의문이 들었다. 창피해야 하는 거야? 하여 직접 확인해 보려고 발품을 좀 팔아 마을마다 세워진 기념비의 양상을 둘러봤다. 동네마다의 동상들 중에는 위대한 인물도 있지만, 부끄럽고 비극적인 다른 나라의 과거사 증언도 많았다. 그러니 미국 내의 기념비에 대한 인식은 꼭 위대함과 훌륭함을 기준으로 세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얻었다. 그 몇몇의 예는 다음과 같다.

저지 시티의 아름다운 강변에는 아주 극적인 모습의 동상이 서 있다. 한 군인이 총에 꽂힌 칼을 맞으며 막 쓰러지는 순간의 포착이다. ‘Katyn Memorial’인 이 동상은 1940년에 있었던 카틴 학살을 잊지 말자고 1991년에 세워졌다. 2차 세계대전 중 폴란드는 나치와 소련 사이에서 나라가 둘로 나뉘었고, 동부에 있는 카틴 시는 소련군이 점령했다. 소련군은 스탈린의 명령으로 카틴에서 2만 명의 전쟁포로를 다 죽였다. 이를 잊지 말자고 아무 연고도 없는 미국 땅에 10미터 높이의 동상을 세운 것이고, 동상의 지지대 안에는 카틴의 흙이 들어 있다.

9/11도 사실 미국으로 보아서는 뼈아프고 부끄럽게 ‘당한’ 역사다. 이를 기념하는 구조물은 여기저기 많지만, 뉴저지에서 자유의 여신상으로 가는 페리 선착장 근처, 무너져 내린 월드 트레이드 센터 바로 강 건너에 2011년 ‘Empty Sky'라는 기념비가 섰다. 1993년의 월드 트레이드 센터 공격과 9/11시 맨하탄 및 펜타곤에서 사망한 뉴저지 주민 746명을 기리는 기념물로 망자의 이름이 하나하나 새겨져 있다.


강 건너 맨하탄에는 연방 역사 지정물인 아프리카 노예 매장지가 있다. 이곳은 1630년부터 1795년까지 맨하탄 건설에 힘을 보탰던 노예들(자유인이 된 노예 포함)의 매장지였다. 1991년 이곳에 연방정부 청사를 세우기 전에 지하 30피트까지 탐사를 했고, 흑인 1만5,000명의 시신을 확인했다. 야외 기념비와 방문센터 외에도 현재 이곳에는 도서관과 연구실이 함께 있고, 무엇보다도 아무도 그들 노예들에게 “우리가 너희를 개명 천지로 데려왔으니 우리에게 고마워하라”는 주장은 하지 않는다.

이밖에도 많지만 포트리로 돌아가서,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은 위안부 기념비가 아니라 그 역사를 창피하다고 묻고 싶어하는 우리의 마음이다.

<한영국/소설가>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