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선 요즘 일본상품 불매운동이 한창이라는 소식이 들려온다. 일본 아베정부가 한국의 핵심산업인 반도체 원료수출을 규제함으로써 발발된 이 운동의 이면엔 전범국의 뻔뻔함과 피해국의 원한 등이 뒤엉켜있어 해법이 쉽지 않아 보인다.
과연 전범국과 전범 기업들의 법적 책임한계는 어디까지일까? 공교롭게도 작년 10월 한국에 이어 최근 미국법원에서도 이 물음에 대한 판결이 나와 주목을 끈다.
한국 판결은 일제시절 나가사키현 나가사키항 남서쪽으로 약 18km 떨어진 섬 ‘군함도’로 이야기가 거슬러 올라간다. 이곳 무인도에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800여명의 한국인들은 해저막장에서 석탄채굴 작업에 동원되었는데 굶주림과 갱내 유독가스 등 작업환경이 워낙 열악한 탓에 공식확인 사망자만도 134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군함도 생존자 4명은 체불임금을 받기 위해 1997년 오사카 지방법원에서 전범기업 ‘일본제철’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 최고재판소까지 올라가는 끈질긴 법정투쟁에도 불구하고 결국 패소하고 말았는데 1965년 체결된 한일청구권 협정에 따라 개인 간에는 배상 의무가 없다는 게 패소 이유였다.
그들은 굴복하지 않고 2005년 한국법원에다 손해배상 청구를 다시 시작했고 작년 10월 마침내 대법원은 1인당 1억원씩 배상금을 지급하라는 원심을 확정하였다. 20여년 끌어온 소송은 승소했지만 이춘식 할아버지 한 분 외 다른 원고들은 모두 세상을 떠난 터라 그야말로 상처뿐인 영광인 셈이었다. 대법 확정판결과 상관없이 일본제철은 애초부터 배상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한국법원은 일본제철의 한국내 자산에 대한 매각절차에 착수했다. 이 매각절차에 따른 아베총리의 보복조치가 바로 반도체소재 수출규제 카드였던 것이다.
한편 세계 문화의 중심지이자 유대인들이 많이 사는 뉴욕시에서는 나치 약탈 예술품에 대한 유대인 후손들의 반환소송이 종종 일어난다. 최근 일단락 지어진 뤼프 對 나기(Reif v. Nagy) 사건이 대표적 예인데 아직 식민 피해가 완치되지 않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스트리아 빈에 살던 유대인 미술품 수집가 프리츠 그룬바움(Fritz Grunbaum)은 오스트리아의 천재 화가 에곤 실레(Egon Shiele)의 작품을 수십 점 소장하고 있었다. 1938년, 나치는 그룬바움의 미술품을 강탈 후 그를 다하우 수용소에 가두었고 그룬바움은 그 곳에서 3년 후 숨지고 말았다.
그룬바움의 소장품 중 ‘얼굴을 숨긴 여인(Woman Hiding Her Face)’과 ‘긴 앞치마를 두른 여인(Woman in a Black Pinafore)’ 두 작품은 2000년대 초반 영국인 미술상 나기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나기가 뉴욕에서 이 작품들을 진열하고 판매하는 과정에서 그만 그룬바움 후손 뤼프의 눈에 발각되고 만 것이다. 곧바로 반환소송이 시작되어 원심은 상속인들에게 소유권이 인정된다며 뤼프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 항소심 판결이 이 달 초 맨하탄 소재 뉴욕 주 제 1항소법원에서 나온 것이다.
판결문 작성은 우연히도 슬픈 식민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인도 이민자 출신 싱(Singh)판사 손에 맡겨졌다. 싱판사는 2016년 통과된 홀로코스트 수용미술품 회복법(Holocaust Expropriated Art Recovery Act)에 의거 전쟁으로 빼앗긴 문화재는 공소시효가 적용되지 않음을 적시하고 유대인들의 예술품을 빼앗아간 나치의 소행은 시대를 초월하여 엄연한 강도짓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그러면서 “뉴욕이 장물 문화재의 합법적 거래온상이 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고 선언했다. 즉 법적 관점에서 전시에 불가항력으로 침입자에게 빼앗긴 재산과 권리를 공소시효 문제로 인해 되찾지 못하는 법은 공평하지 않다고 본 것이다.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체결로 개인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소멸했다고 판단하는 일본 사법부 시각과는 사뭇 상반된 것이다.
군함도는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는데 당시 일본정부는 조선인의 강제 노역사실 인정 및 이를 공표하는 정보센터 건립을 약속한 바 있으나 4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 뭉기적거리고 있다. 이춘식 할아버지 같은 강제 징용자들을 역사에서 지우려는 걸까?
이렇게 군함도와 에곤 실레를 둘러싸고 전범국과 전범 기업의 법적, 역사적 책임이 다른 모습으로 투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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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경락/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