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비 갠 오후

2019-07-26 (금) 최동선/ 수필가
크게 작게
밤새도록 창문이 아프게 비가 내렸다. 그리고 그 비는 아침까지 허공에 굵은 사선을 그리며 내리쳤다. 나는 감히 외출 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창가에 선 채 나무가 빗속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내리는 비를 꼿꼿이 맞으며 새 한 마리가 그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었다. 가끔씩 비를 털어 내면서도 자리를 뜨지 않는 그 새에 마음이 쓰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넉넉한 휴일의 아침이 좋았다. 비 만 그치면 풀 냄새 진한 여름의 한가운데에 서게 될 것이기에 조금은 설레기도 했던 것 같다.

십 수년을 한 동네에 살면서도 오늘처럼 날씨가 변덕을 부리거나, 계절이 바뀔 때마다 주변의 풍경이 낯설게 느껴진다. 일터로 오고가는 길과, 가끔 들르는 쇼핑센터로 가는 길 이외에는 다녀본 길이 많지 않으니, 그 길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스스로 이방인을 자처하며 GPS에 의존하곤 했었다. 몇 주 전, 늘 다니던 길에서 도로공사를 하며 돌아가라는 표지판을 만나 난감했던 경험을 하고 난 후에 언젠가 시간을 내어 동네의 구석구석을 돌아보리라 생각했었다.

마침 오후에 날이 개이고, 아내와 마을을 가로지르는 작은 강을 따라 걷기로 한다. 그 강의 남쪽은 내가 한 번 쯤은 지나쳐 간 곳이라 낯설지 않았다. 작은 경찰서 옆에는 샤핑센터가 있고, 그 맞은편에는 새로 지은 소방서가 있다. 소방서를 지나 한 블럭 건너편에는 허름한 피자집과 낡은 이발소가 오랜 세월을 함께 견디고 있다. 깊은 돋보기를 쓴 이발소 주인은 피자집에서 신문을 펼쳐놓고 읽었다. 허리 굽은 노인이 라플 티켓을 사러 들어갔고, 작업복 차림의 남자가 따라 들어가며 아는 척을 했다. 던킨 커피숍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젊은 여자의 화장이 유난히 붉다.


사람들은 어제와 변함없이 대부분 무표정했고, 가끔씩 웃었다. 큰 길을 벗어나면 골목마다 커다란 집들이 숲 속에 숨어서 이웃이 아닌 듯 이웃하고 있고, 정원사들의 손길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정원이 뽐내듯 이어져 있다. 이것이 내가 사는 남쪽의 모습이었다.
북쪽 강변으로 차를 옮겨 세웠다. 강변을 따라 가다 보니 부서진 철교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동안 멀리서만 바라보던 교각의 철 구조물이 붉게 부식한 채 강에 걸쳐져 있었고, 강과 어우러진 풍경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철길을 따라 젊은 연인이 걷고 있었고, 젊은 여자의 명랑한 웃음소리에 놀란 새들이 하늘로 높이 날아올랐다. 전에는 보지 못했던 산 너머의 산이 보이고 물 안의 물이 보였다. 마치 낯선 도시로 잠시 여행을 온 것 같은 착각을 했다. 그러나 이곳 역시 내가 사는 곳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삶에 대해 모두 안다고 말 할 수 없다. 다만 볼 수 있지만 읽을 수 없는 문장을 앞에 두었을 때처럼, 이해 할 수 없는 구절을 반복해 읽을 때처럼, 삶은 여전히 모호하고 불확실하다. 그러나 부지런한 새 소리는 어제와 다르지 않고, 그렇게 오늘도 삶은 치열하게 이어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지나가다 문득 발걸음을 멈춘다. 낡은 벽 앞에 키 작은 들풀이 나란히 서 있다. 허물어진 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 넝쿨의 질긴 생명력에 잠시 경이로움을 느끼며 담장 안쪽을 훔쳐본다. 모퉁이에 떨어진 씨앗 하나에서 싹이 돋아나고, 그 싹이 빛 한줄기, 비 한 방울, 바람 한 점을 모아 꽃을 피워내는 것을 보며 기적은 이렇게 날마다 내 주변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나지막이 들리는 풀잎들의 소리, 무너진 담장을 타고 오른 하얀 나팔꽃, 아무 일도 없는 평범한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최동선/ 수필가>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