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비석들 태평양을 건너다

2019-07-26 (금) 채수호/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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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7일 부산항을 출발한 4기의 비석은 12일간의 항해를 마치고 7월19일 캘리포니아 롱비치항에 도착하였다. 비석들은 통관을 마치고 열차 편으로 달라스까지 간 후 그곳에서 트럭에 실려 8월10일 경 목적지인 아칸사스주 리틀록에 도착할 예정이다. 충청남도 온양에서 출발한 비석들이 태평양을 건너 미국 땅에 온 것이다.

온양에서 서북쪽으로 삼십리 떨어진 염치면 염성리 낮으막한 산자락에 자리잡은 조상의 산소에는 할아버지를 비롯해서 큰아버님과 아버님, 작은 아버님 등 3형제분의 묘소가 있었다.

아버님 형제분들은 우애가 각별히 돈독하셨다. 집안이 가난했던지라 인석과 의석 두 형은 어렸을 때부터 직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맏형 인석은 6.25때 우익인사로 인민군에게 끌려가 대전형무소에서 무참하게 총살당하였다. 필자의 아버님인 의석은 비록 자신은 못배웠으나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각급 학교를 여러 개 설립하였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도 교육위원에 피선되었다.
일본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셋째 은석은 큰형님의 원수를 갚는다며 신생 대한민국 정부의 국방부에 들어가 고위 관리가 되었다.

막내 경석은 의과대학 재학 중 6.25가 터져 서울이 사흘만에 인민군에게 점령당하자 인민군 의무병으로 강제 징집 당하였다. 낙동강 전선까지 끌려간 경석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탈출에 성공, 대한민국 국군에 의무병으로 입대하였다. 의무장교로 제대한 경석은 미국 유학길에 올라 미국 의사가 되었다.

개업의가 될 때까지 잠시 미군 군의관으로 복무했으니 경석은 인민군복과 국군복 그리고 미군복 등 3나라 군복을 모두 입은 흔치않은 기록의 보유자가 되었다.

아버님 4형제분 중 미국에 있는 막내 경석을 제외한 인석, 의석, 은석 등 3형제분의 산소가 있는 염치 산소는 명절이면 친가와 사촌형제들이 함께 모여 성묘를 하고 우애를 나누는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었다.

그런데 시대가 변하고 산소를 돌 불 후손마저 끊어질 지경이 되자 형제들끼리 상의한 끝에 어쩔 수 없이 파묘(破墓)를 하게 되었다. 유해를 화장한 후 서울 근교의 납골 공원에 모시기로 한 것이다.

문제는 비석이었다. 유해는 이장하면 되지만 비석까지 납골묘원으로 갈 수는 없는 일. 그렇다고 고인의 존함과 일생의 행적이 기록된 비석들을 그대로 땅에 묻어버리거나 폐기할 수도 없었다. 마침 아칸사스주 에서 농장을 경영하는 사촌동생 데니스가 이 소식을 듣고 비석들을 자기 농장으로 보낼 것을 제안 해왔다. 자신의 농장 안에 염치 산소에 있던 조상 묘와 똑같이 한국식 봉분 하나를 조성하고 그 앞에 비석들을 나란히 설치하겠다는 것이다. 아칸사스주에 평강채씨 가족묘가 조성되는 것이다.

산소 조성공사가 완성되면 한국에 있는 형제들을 불러 같이 성묘를 하고 축문을 읽어 조상님들의 미국나들이를 신고할 계획이다. 하늘나라에 계신 할아버지와 4형제분들도 기뻐하시겠지.

<채수호/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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