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리셋 (reset)

2019-06-07 (금) 고명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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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네티컷 칼럼

산기슭 그림자도 점점 길어지는 일 년의 중간 지점에 서있다. 한껏 물이 오른 푸른 기상은 자연이 값없이 베푸는 선물이다. 하루를 만나러 가는 익숙한 길목 풍성한 나뭇잎들의 속살거림이 잔잔한 묵상으로 다가온다. 추위를 무릅쓰고 옹알이 하던 청 보리의 들녘이 황금물결로 출렁인다. 손에 잡히지 않는 고국의 풍경이 마치 따스한 어머니의 체온 같다. 타국에서도 계절은 순리대로 여름을 대비하고 물러설 수 없는 삶의 흔적도 다양하게 채색되어 간다.

새해를 시작할 때 한 달 묶음으로 된 열두 개의 백지 책이 배달되었다. 사용할 수 있는 기간은 일 년이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절대 반환 할 수 없다. 하루라도 건너뛰거나 실수했다고 지우개로 지우는 일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지나온 일의 실적이 작아서 아쉽다거나, 분에 넘쳐서 떠나보내기 싫어도 시간이 차면 되돌릴 수 없는 과거로 기록되는 책이다. 예외 없이 누구에게나 주어진 숙제이지만 문제와 정답은 개인의 몫이고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 편집하거나 삭제할 수 없으니 빠짐없이 신중하게 기록해야 한다.

여섯 번째 백지 책을 조심스럽게 펼친다. 일생에 단 한번 만남에 기대와 걱정이 앞선다. 어제같이 오늘도 세월의 소리가 둔탁하지만 예쁜 꽃들과 청아한 새들의 노래로 첫 페이지를 장식해 보련다. 매월이 소중한 달이지만 일 년의 중심에 자리한 유월은 또 다른 시작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지금까지는 구불구불한 샛길을 걸어 왔다 할지라도 쭉 뻗은 신작로가 열릴 것 이라는 믿음이 수고를 멈출 수 없는 이유이다.


바람에 쏠리는 나뭇잎 소리에 새들이 달아난다. 흩어지는 새들보다 파닥거리는 사념을 다독거린다. 무디어진 기억의 벽에 기대어 잃어져 가는 것들을 되새김한다. 소망 가득 찾던 신실한 갈망은 세월의 구름다리를 오르내리며 빛이 바래고 만남과 헤어짐의 시간에 매달린 의미는 아직 여물고 있다. 여백의 미가 균형 있게 잘 표현된 그림을 훌륭한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하얀 백지 위에 여백은 혼탁해진 생각을 걸러내기 위한 마음의 아지트와 같다. 세상을 향해 낮추기도 하고 한 뼘 커지는 자양분의 샘터이다. 달리는 기차에도 간이역이 있듯이 쉬지 않고 이끌어 온 걸음을 잠시 멈추고 긴 호흡을 가다듬는다.
한 학기가 끝나고 중간고사를 치르고 나면 새로운 각오를 다지곤 했던 풋풋한 학창시절로 되돌리고 싶다. 다시 돌아간다면 지나온 기록을 모두 지우고 그 위에 빼곡히 정답을 적을 것 같다. 지나ㅁ쳐 버린 사소한 것들에게 말을 붙이고 무엇을 좋아했는지 나에게도 꼭 물어 보리라. 맵고 쓰고 단맛을 더 진하게 체험 해야겠다. 펼쳐 읽는 책갈피마다 치열한 땀의 흔적을 남겨 두리라. 끼니 걱정을 하는 아내 앞에 주머니를 털어 꽃다발을 내민 어느 시인의 속마음도 들춰 보고 싶다. 최선을 다해 헤쳐온 길이라 해도 돌이켜 보면 지우개가 필요한 페이지가 있기 마련이다.

삶의 일그러진 조각들을 정렬하고 붉은 펜으로 밑줄을 긋는 연습을 오늘도 반복한다. 첩첩이 쌓여 가는 세월을 이고 뒤돌아보니 어느새 일 년의 반을 달려왔다. 모든 것을 다 지운다 해도 비바람 폭풍우 상처 많은 훈장도 삶의 일부라는 것을 감사하며 새겨 두리라. 땅거미 찾아 든 밤이 오면 누구도 모르게 하얀 백지의 여백을 또렷이 채워야겠다. 꿈속에서라도 이루어 보고 싶은 내 인생의 “리셋”.

<고명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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